보고 싶어, 보고 싶어요
깊은 정성이 그리운게야
보고 싶어, 보고 싶어요, 라고 문자를 보내면 응, 하고 대답하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연일 일에 치이다 보니, 오롯한 관계학이 마음 안에서 서성거린다. 저사람 왜 저러지 부터 이사람은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하는 것까지 온통 관계안에서 울고 웃는다. 사람이 주는 힘이 울트라파워 강력모터이다.
모임에 가면 늘 이방인이다. 이도저도 아닌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서글프고, 서럽다. 아는 사람이 있든 없든 낯가림이 있어서 명함 돌리고 인사하고 뭐 그런 사교적인 태도를 못 보인다. 애써 이번에는 인사 좀 해야지 하다가도, 명함 주고 받아서 서로 아는 사이가 된 적이 없다, 는 경험적 잣대를 들이대면서 또 그냥 꿔다 둔 보리자루가 되어버린다. 얼마나 불편한지,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숨이 막힐 지경이 된다. 그러면 조용히 나온다.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는 경우가 허다해서 정장(어려운 모임에 정장 입는다) 입고 가는 모임을 갈 때는 숨호흡을 한 열 번 쯤 품고 가는 모양이다.
관계. 우리들 일상에서 관계가 주는 힘은 어디에까지 뻗쳐 있을까. 일을 관계로 풀어내는 것, 사랑을 관계로만 해석 하는 것, 그 틈에서 관계는 어느 것에 중심을 두어야할지 어질어질하다. 할 말 똑부러지게 하는데도 협업을 잘 하는 사람이 있고, 늘 배려하는 형상을 하는데도 협업만 하면 시끄러워지는 사람도 있다. 무슨 차이일까. 무슨 차이로 '시끄럽지 않게, 잘' 하는 것을 못 할까.
삶이 어지럽다는 생각이 들면 스스로 치유하는 방법들이 한 두가지씩은 있을 것이다. 내 경우는 공연과 책이다. 공연은 머리 풀어 정신줄 놓고 미친듯이 폴짝폴짝 뛰는 락공연을 즐긴다. 특히나 YB의 공연은 그야말로 보약 한 첩이다. 요 며칠 사이 지인이 애써 끊어준 YB공연을 보러 지방까지 다녀왔다. 혼자서 소리 지르고 노래 따라부르고 눈물 찔금거리면서 제대로 즐기고 왔다만, 20년 오래된 팬 입장으로 볼 때 그 날 공연은 뭔가 덜 익은 김치 같은 맛이 나더라. 이게 모모 공공기관에서 초청한 공연이다 보니 뭔가 관공서 냄새(?)를 풍기는 보수성이 약간 있어, 그들은 관객들과 관계를 제대로 못 풀어낸다고나 할까. 물론 나 역시 덜 뛰다 왔다. 이렇게 같은 사람임에도 상황에 따라서 즐기고 풀어내는 것에 차이가 생긴다.
온전한 내 편은 얼마나 있을까. 뭐든 박수 쳐 주고 뭐든 믿어주는 확실한 내 편은 얼마나 있을까. 또 우리는 타인들에게 얼마나 온전한 그들의 편이 되어주고 있을까. 누군가 그러더라. 도와달라고 부탁을 못 하는 사람은 도움을 받아본 적도 없고, 도움을 준 적도 없으니 "도와주세요" 라는 부탁을 소신껏 못 하는 것이라고 하더라. 그 말에 무한 공감을 했다. 역시 온전한 내 편을 얻으려면 내가 먼저 확실하게 엎어지는 정성을 보여야 가능하다. 이래저래 이해관계 따지지 말고 그냥 엎어지는 것, 그게 필요하다. 결국 사람이 사람을 모은다는 생각이다.
보고 싶어, 보고 싶어요, 라고 무심히 던지는 전화기에, 그래? 지금 볼까 라고, 바로 응대해 주는 온전한 내 편이 그립다. 아니다, 깊은 정성이 그립다는 말이 더 맞는 것 같다. 깊고 그윽한 정성이 주는 힘이 더 그리운게다.
보고 싶어, 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