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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메달 Sep 13. 2023

왜 공연장에 가는가

공연은 숨구멍이다 

왜 공연장에 가는가?     


우리는 공연장을 왜 갈까. 코로나 시절에 공연장을 못 가서 우울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공연장 간다고 밥이 나오고 떡이 나오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인간 본성의 법칙>을 쓴 로버트 그린은 그의 저서에서 “자신의 본성에 정직해야 한다” 라고 했다.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고 싶고, 그 이야기 안에서 자신의 인정지수를 만들고 싶고, 대화하고 싶어서 모두 입이 근질거리는 사회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런 만남들에서 에너지를 많이 만드는데 코로나로 그런 모임을 가질 수 없으니 공연장이라도 가서 자신의 에너지를 오롯이 보내기도 한다. 아니면 반대로 평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완전하게 인정받지 못 했다 싶을 때 공연장 가서 어쩌면 우두커니 보는 것으로 대리 만족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021년 봄 여전히 코로나가 창궐하는 그 즈음에 나는 지역에서 ‘코로나블루 끄떡없어 시즌2’ 라는 제목을 걸고 온오프믹스 북토크를 했었다. 코로나를 이겨낼 만한 정신적 버팀목이 될 만한 책을 찾고, 저자를 불러서 이야기를 나누는 북토크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동시 진행이었다.     



무대를 밝히던 희미한 조명이 꺼집니다. 서서히 내려앉는 어둠과 함께 객석의 웅성거림도 잦아들죠. 짧은 고요가 흐르고 이어지는 미세한 긴장함, 그리고 암전. 현실의 시간에서 무대의 시간으로 데려가는 마법의 장치, 가만히 눈을 감습니다. 카운트다운을 시작해 볼까요? 하나, 둘, 셋. 눈부신 스포트라이트 속에 드러나는 배우의 실루엣. 그녀가 이야기를 건넵니다. 자, 이제 시작합니다. 오늘 밤의 연극을. 

- 최여정 <이럴 때, 연극>, 틈새 책방, 2019, 프롤로그 중에서       



4주 연속 북토크 시리즈 중에서 첫 주자로 나온 최여정 작가의 <이럴 때, 연극>의 서문이다. 우리는 객석의 웅성거림과 짧은 고요에서 비로소 시작하는 연극 한 편을 보기 위하여 공연장을 찾는다. 창작극이 아닌 고전극은 그동안 책이나 방송으로 많이 노출되었는데 굳이 공연장을 왜 가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아니 일 년 열두 달 공연장 한 번 안 가는 사람도 있다. 공연장 간다고 밥을 먹여 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공연, 문화를 기획하고 홍보하는 일을 하는 최여정 작가는 무대 뒤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일들이 매번 힘들어서 도망가고 싶다고 늘 말하지만 프로젝트가 끝나면 또 어느새 무대 뒤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북토크에서 했었다. 무대를 만지는 사람만 그럴까. 관객도 바쁘다 하면서 혹은 코로나 때문에 사람 많은 곳이 꺼려진다고 하면서 어느새 무대 앞에 가 있다. 무대 앞에서 연극을 보고, 뮤지컬을 보고, 음악을 즐긴다.      



내 지인 중에 공연장을 정말 밥 먹는 끼니처럼 자주 가는 사람이 있다. 장르 불문이다. 뮤지컬도 가고, 연극도 가고, 오페라도 가고, 가곡 무대도 간다. 어쩌면 자기 지역 반경안의 모든 공연 정보는 꿰뚫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물어봤다. 왜 그렇게 공연장을 자주 가느냐고. 일단 프리랜서 기업체 교육 강사인데 코로나로 일이 없고. 일이 없는데 그저 우두커니 있으면 죽을 것 같아서 숨 쉬러 공연장을 간다고 했다.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일이 없으니 소득도 떨어졌을텐데도 계속 간다. 힘들지만 공연장을 그나마 가니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이다. 직접 구매하는 티켓도 있고, 무슨 관전평 써서 프리패스 되는 티켓도 있다고 했다. 그 지인에게는 공연장이 숨구멍이었다.      



내 경우도 공연광이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는 못 갔다. 심장이 쫄깃한 겁쟁이라 방역이 아무리 잘 되고, 한 자리 띄어 앉기를 한다고 해도 코로나 때문에 무서워 못 갔다. 코로나 때문에 공연장을 못 가고 있지만 나에게도 공연은 숨 구멍이었다. 콘텐츠 생산장이기도 하다. 나는 오랜 기간 YB 팬이다. 윤도현이 ‘타잔’으로 데뷔할 때부터 지금의 YB밴드로 활동할 때까지 근 삼십 년 가까이 팬이다. 당연히 공연장 많이 가 봤다. 처음 YB공연장을 다닐 때는 그냥 음악이 좋았다. 혼자 공연장 가서 광광 뛰다 보면 그냥 스트레스가 해소 되었다.  


    

그러다 기업체 교육강사로 일 하기 시작할 즈음에 YB공연 전국 투어를 따라 다닌 적 있다. 똑같은 레퍼토리로 전국투어를 다니면서 그 관객들의 반응에 따라서, 현장의 분위기에 따라서 대처하는 그 모습들을 보고 싶었다. 기업체 교육강사도 사실은 거의 비슷한 주제로 각각 다른 교육장을 다니니 그 때마다 상황대처를 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 예기치 않은 돌발 상황이 벌어졌을 때 뮤지션은 무대에서 어떻게 대처하는가, 그것이 내 관전 포인트였다. 그동안 특별한 돌발 상황은 없었으나 제일 기억나는 것은 첫 팬 공연 꿀파티 때는 돌발 상황이 있었다. 여기에서 자세히 언급할 것은 아니나, 그 상황 이 후에 팬카페에서 문제해결을 하는 방식. 역시 YB였다. 그 때 내가 YB팬이었음이 얼마나 다행이고, 자랑스러웠는지 아직도 생생히 기억된다.     

 


이렇게 공연을 일의 문제해결법으로 활용하는 사람도 있고, 숨구멍이다 하는 사람도 있다. 숨구멍을 뛰어넘어 온전히 자신을 치유하기 위하여 무대 앞을 기꺼이 즐기는 사람도 있다. <요즘 덕후의 덕질로 철학하기>를 쓴 저자 천둥은 국카스텐 팬이다. 공연의 치유가 얼마나 컸으면 국가스텐 덕질하는 것으로 책으로 냈겠는가. 이런 경우는 덕업일치가 된 케이스이다.     


     

친구가 공연에 가면 무엇이 제일 좋으냐고 물었다. 대뜸 ‘내 꺼’라고 답했다. 그제야 온전히 나에게 온전히 나로 존재하는 시간이 필요했다는 자각이 생겨났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로서 나만의 시간 속에 몰입되는 순간이 내게는 국가스텐 공연인 것이다.   

   -천둥, <요즘 덕후의 덕질로 철학하기>, 초록비책공방, 2020, p68       



천둥 저자는 나를 즐기는 나의 자아를 공연을 통하여 느낀다고 했다. YB공연을 즐기는 나로선 국카스텐 공연에서 자신의 온전한 몰입을 느낀다는 말, 완전 이해된다. 국카스텐이 아니더라도 공연장에서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힘, 그거 아는 사람은 안다. 사실 요즘은 방탄소년단에 많이 빠져있는데 완전체 활동을 안 하고 있는 탓에 공연도 없기도 하다만, 얼마전에 했던 솔로 월드투어 중에서 한국 공연을 5일이나 했으나 티켓을 못 구해서 못 갔다. 방탄소년단 공연을 가게 되면 아마도 내 안의 이런 저런 걱정이 다 날아갈 것 같다. 



코로나가 좀 잠잠해지던 작년에 공연 두 개를 다녀왔다. 하나는 YB전국투어와 이승윤 전국투어. YB공연은 워낙 일찍, 1열만 찾아서 지역 불문하고 티켓팅을 한 덕분에 1열에서 미친듯이 놀다가 왔다. 마스크를 끼고 있었으나 소리는 지를 수 있어서, 소리를 질렀고. 1열이나 앞 사람에게 민폐 끼칠 일 없으니 미친듯이 뛰다가 왔다. 같이 간 지인은 고맙게도 YB가사를 다 외워서 왔더라고. 결혼 후 20년만에 처음 와 본 공연이라고 하는데 마음이 짠했다. 1열의 관객으로 예의를 갖추기 위하여 가사를 공부하듯이 외웠다고. 1열에서 떼창을 못 따라하면 1열 관객이 될 자격이 없다고 이야기하더라고. 그리고 공연 후 참새처럼 종알거리는 공연 후기는 YB의 음악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쏟아내는 자리이었다. 정말 가슴이 뛰었다. 1열이라 윤도현이 바로 앞에서 노래를 부르니 숨을 쉴 수가 없았다 부터 이렇게 가슴 뛰는 일을 나는 그동안 왜 못 하고 살았나 싶어서 속상하다고. 나는 늘상 즐겨왔던 YB공연이라 새로울 것이 없었다. 코로나 이 후에 처음 와 본 공연장이라 그저 내 안의 스트레스를 날리는 것, 그리고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이었다. 



이승연 도킹 전국투어에서 대전콘을 혼자 갔다. 그 공연장에서 느낀 것은 이승윤은 음악을 하지 않았으면 어쩌면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1층과 2층 관객 사이를 헤집고 다니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소롬이 돋었다. 저 끼쟁이를 어쩌면 좋을까. 신이 있다면 감사하고 싶었다. 이승윤에게 기회를 만들어준 <싱어게인>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이승윤 공연 보면서 나의 무대, 나의 교육장이 생각났다. 30대 이 후로 처음으로 무대에서 마이크 잡고 열정을 쏟는 것을 제대로 하고 싶은 것이다. 저런 열정 나도 남았나 하는 생각들. 강력한 에너지를 담고 왔다. 



어느 날 페북에서 50대 중년 남성이 자신의 아내가 이승윤에게 빠져서 전국 공연을 따라 다닌다,는 글을 남겼다. 이승윤이라는 가수에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이 이해가 안 되고, 너무 심해서 병원을 가 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심히 걱정된다고 했다. 



그 글에 댓글들 대부분은 이러했다. 

 "건강하다"

 "열정이 좋다"

 "그 즐김이 부럽다"

"응원해줘라"

"무슨 병원이냐" 


이런 댓글에 글쓴이는 오히려 적잖이 당황해 하는 모습을 보였다. 중년 여성이 30대 가수에 빠져서 정신 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절대 문제되는 상황이 아니라고 하니, 놀란 모양이었다. 공연이 주는 힘을, 공연이 주는 에너지를 이해 못 하는 것이었다. 



공연은 현대시대에만 있고 예전에는 없었는가. 아니다. 중세 시대 클래식 공연에도 관객들은 당연히 있었다.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음악적 정서를 비교적 많이 물려받았다는 리스트는 소위 오빠 무대를 몰고 다녔다. 그 당시 리스트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으면 지문 만평에도 피아노 옆에 모여 있는 여성팬들의 모습이 늘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 리스트 하면 피아노 선율 만큼 낭만적 그 무엇이 몽근몽근  떠오른다. 그 당시는 음원이 있는 시대가 아니니 오롯이 공연장을 가야만이 음악을 즐길 수 있었으리라.           



다시 돌아와 공연장을 왜 가는가? 라고 물어본다. 내 경우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숨 구멍이고, 여러 문제해결의 방법을 찾기 위하여 공연장을 간다고 언급했다. 여러분은 공연장을 왜 가는가? 세상에 태어나 공연장을 한 번도 못 간 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단언컨대 공연장을 안 가 본 사람은 있어도 가 보고 그 맛을 즐긴 사람이 딱 한 번만 가 본 사람은 드물 것이다. 어쩌면 늪이고, 어쩌면 중독일 수 있는 공연장. 그 안에서 울고 웃는 그 무엇의 연결고리들이 있으리라.      



코로나 때문에 관객도 공연이 고팠고, 문화예술가도 무대가 고팠다. 이 시절 우리는 이 공연의 메카니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공연이 주는 힘, 그거 온전히 느껴 본 사람과 공연 수다를 떨 수 있으면 좋겠다. 공연장을 한 번도 안 가 본 사람은 이제 공연장 갈 볼 목표를 잡아보자. 동네 작은 공연장에서 무료로 하는 공연부터 시작하여 사부작사부작 유료 공연으로 옮겨가 보는 것, 나는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삶의 색깔이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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