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늘보 같았던 지난 주말 단상.
이번 주말 나는 대략 이러했다. 먼저 하루키의 처녀작(이지만 상을 받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읽었고, 그다음 만화로 된 조선왕조실록 몇 권 정도를 읽다가, 아예 유튜브를 보며 조선에 대한 복습을 했다. 마지막으로 또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었는데 이 모든 과정은 대략 금요일 늦은 밤부터 시작해서 일요일 밤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간 동안 잠을 자거나 밥을 먹을 때를 빼고는 줄곧 기다란 갈색 소파에 반 정도 누워있었으니, 인간 나무늘보와 다를 바가 없었다고 할까. 그럼에도 옆에서 '동물의 숲'을 하던 아내는 자신에 비해 나의 나무늘보 시간을 생산적 활동의 범주에 넣어주니, 독서에 대한 사람들의 시각은 정말이지 관대할 따름이다. 내 생각에는 게임이나 독서나 크게 다를 바도 없는 데다가, 특히 이번 주말 아내의 동물의 숲이 스트레스 해소 차원에서 훨씬 가치가 있었음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암턴 독서의 중간에 갑자기 조선왕조실록이 떠올랐다. 나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세트를 굉장히 아끼는데, 이것과 고 이윤기 님께서 쓰신 그리스 신화 세트는 매해 한 번씩은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주의이다. 이유는 모르겠다. 지금 이 순간 골똘하게 생각해 보았는데 역시 생각이 안 난다. '핸드폰은 항상 왼쪽 주머니에 넣고, 지갑은 항상 오른쪽 뒷주머니에 넣는다.' 정도의 습관인가 생각이 든다. '핸드폰과 지갑의 위치 따위 아무려면 어때!'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의 경우 그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의외로 불안해서 일상이 어지러워진다. 그러니까 핸드폰과 지갑의 위치는 매 외출 시마다 지켜야 할 나의 습관이라면, 조선왕조실록과 그리스 신화는 그 호흡이 매년짜리 습관 혹은 강박이 되었나 보다.
조선왕조실록을 읽다가, 문득 왕후들의 이름을 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들은 '태정태세문단세...'로 시작하는 암기법도 존재하는 마당에 '아무리 조선 사회가 남성 중심이었다 한들 이건 좀 불공평하잖아'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시 이놈의 태정태세문단세들은 왕후뿐만이 아닌 여인들이 너무나 많아 어려웠다. 결국 하는 수없이 일단은 공혜왕후까지만 외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공혜왕후가 누구의 아내였는지는 말하지 않을 작정이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나만 알게 된 듯한 보람이 생길 것 같아서.. 히히. 그러다 보니 또 조선의 당파싸움이 그리워져 다시금 공부하기 시작했다. 공부라고 하기에는 그 기다란 갈색 소파에 누워 유튜브를 시청한 것뿐이지만.
조선왕조실록을 매해 한 번씩 읽는다고 꼭 조선을 좋아한다는 것은 아니다. 엄밀히 말해 나는 조선을 애증 한다. 하지만 조선의 억지스럽고, 심술 가득한 꼰대들의 이야기가 제법 재미있다. 특히나 이야기가 '송시열'정도에까지 이르면 이것 참 곤란해질 정도이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동학농민운동 정도까지 흘러가면 나는 흥미를 잃어버리기 시작한다. 꼰대 이야기는 즐길 수 있지만, 위정자들의 이야기는 정말이지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조선 땅에 외세가 흘러오며 민족의 자긍심이 고취되는 시점에 흥미를 잃는 다니 이것 참 약간은 민망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내가 원래 좀 그렇다.
내가 원래 좀 그렇다라니, 이렇게 멋대로인 문장이 있을까 싶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가끔은 좀처럼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다. 하루키는 이러한 부분에 있어, 자신의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면을 너무나 많이 차지하게 되는 이야기이니 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 나 역시 그 표현이 마음에 들어 빌리고자 한다. 그래서 나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종교, 정치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무엇인가에 대해 진심으로 단정 짓는 이야기는 문장을 통해 전한 적도 없을뿐더러,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굳이 말해두지는 않았지만 처음 글쓰기에 대한 목표를 정할 때부터의 내 신념이기도 했다. 이는 항상 초고를 아내에게 읽게 하며 굳이 확인을 시키는 이유이기도 하며, 실제로 나는 많은 부분 신념과 달리 보일 수도 있는 문장들을 피드백을 통해 많이도 수정해 왔다. 그러니 만약, 누군가 나의 직전 글(선거에 대한)에 대해 어떠한 종류의 정치적 색깔을 읽었다면, 그는 적어도 나와 비교해서는 조금 더 송시열에 닮아 있지 않을까나. 혹은 내가 글을 잘 쓰지 못했거나. 뭐 그렇다고 해도 나는 송시열을 그리 미워하지는 않습니다만. 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