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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문 Don Kim Dec 05. 2020

'신의 이름으로' 쉽게 맹세하고, 가볍게 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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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랍인과 맹세'    


아랍인들은 때로 무슬림이 아닌 외부인들의 눈에, 종교적으로만 보인다. 많은 현지 무슬림이 사용하는 말끝마다 ‘알라’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화날 때나 즐거울 때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알라’를 언급한다. “야 알라”, “야 랍브” (오, 알라시여)는 기본이다. “대단하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무슬림이 아닌 한 사람의 종교인으로서, 이런 모습에 도전도 받고 자극도 받았고, 때로는 위협적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것은 나의 착시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고릴라>(김영사)에서 저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자기가 관심을 두고 주의 깊게 보는 것만 보는 것이었다. 눈뜨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주의력 착각’을 깨닫는 수고가 필요했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내가 듣고 싶은 것을 들었던 것이다.


예루살렘 통곡의 벽 ©김동문


약속은 확실하게 그러나 지키는 것은 별개?


2008년 11월 중순 헤브론과 베들레헴, 라말라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을 둘러보았다. 현장 방문 중에 헤브론 막벨라 동굴 사원 앞에서 한 팔레스타인 현지인을 만났다. 필요한 자료가 있어서 자료 요청을 하고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약속한 시간에 만나기로 한 장소를 찾았다. 자료는 가져다 두지 않았다. 미안함도 표현하지 않았다. 확실하게 가져다줄 수 있냐는 나의 거듭되는 질문에 맹세를 반복했지만, 그 맹세는 지켜지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맹세해놓고 지키지를 않아!” 불편했지만, 그것이 분노할 일이 아니었다. '맹세'에 얽힌 다른 생각과 태도가 있기 때문이다. 일상을 살면서 우리 모두는 맹세를 하거나 맹세할 것을 요구받곤 한다. 아랍 이슬람 지역에 살면서 맹세 잘하는 이들을 보곤 했다. 이들은 자기 가문의 이름으로, 때로는 자신들이 믿는 절대자의 이름으로도 맹세를 한다. “내가 기독교인인데 (기독교인의 이름을 걸고 맹세를 하건대).. “ 또는 ”나는 무슬림으로서... “로 시작하는 맹세도 많이 접했다.


이렇게 맹세하는 이들 가운데 믿을만한 이들이 많지 않았다는 것이 현실이었다. 명예를 존중한다는 이들 가운데는, 맹세 그것도 거짓 맹세를 주저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거듭 맹세를 하던 이들 가운데는 진짜 거짓말쟁이들도 많았다. 기독교인이었기에 믿었고, 독실한 무슬림이기에 믿었지만, 그들의 맹세와 진실 사이에는 간격이 적지 않았다.     


예루살렘 구시가지 시장 거리에서 기도하는 어떤 무슬림들 ©김동문


아랍인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말 가운데 “인 샤 알라”(إِنْ شَاءَ ٱللَّٰهُ, 짧게 발음하면 인샬라, 알라가 원하신다면..)가 있다. 상당히 종교적으로 들리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자신이 즉답을 하기 싫을 때 또는 자기가 확답을 하지 않을 때 즐겨 이용하곤 한다. “우리 내일 만날까?”라고 말할 때면 상대방인 샤알라”라고 한다. 분명하게 ‘예’, ‘아니오’로(만) 답해 달라고 해도, 그저 '인샤알라'를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나가도 상대를 볼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안 나갈 수도 나갈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 종종 연출되곤 한다. 종종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해보겠다 “ 하면서 부정적인 즉답을 피할 때 ’ 하나님의 뜻‘ 그 뒤로 숨으려는 경향을 생각나게 한다.    


무슬림이 사용하는 언어 가운데 ‘왈라히’(الله, 알라와 함께)가 있다. 일상 대화에서는 “정말로?” 또는 “정말로!” 의 의미로 사용된다. 관용적인 표현 특히나 공문서에 언제나 등장하는 표현으로 ‘비쓰밀라’(알라의 이름으로)가 있다. 이렇듯 일상생활 깊숙이 확실함을 반영하려는 듯 이런 단어들이 일상적으로 사용된다. 물건을 사고팔 때는 물론이고, 일상의 대화에서도 이 표현은 넘쳐납니다. 아랍인들은 ‘알라의 이름으로’ 또는 ‘알라가 지켜보는 데서’ 내가 맹세한다는 식으로 자신의 말을 정당화시키는 경우가 많다. 아랍인들은 또 이런 말을 쓰곤 한다. “알라 라(으)씨”(على راسي, 내 머리를 두고 맹세한다. 일상 회화에서 “기쁨으로 기꺼이 하겠다”의 뜻으로도 사용된다)이다. 누군가에게 부탁을 받을 때면, 오른손을 머리에 갖다 얹으면서 알라 라으씨라고 말하곤 한다.      


반이스라엘 시위 현장에서 구호는 외치는 시위 참가자 ©김동문


때로는 이슬람 지역에서 눈에 핏발이 서있는 이들을 보기도 했다. 이들에게는 맹세가 보복, 피 갚음의 거친 행동이나 의지와 연결될 때가 있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아야 한다는 그릇된 보복 논리를 주고받을 때도 맹세가 등장하기도 한다. 이럴 경우 “알라후 아크바르 알라후 아크바르”(الله أكبر, Allāhu akbar Allāhu akbar, 알라는 위대하시도다 알라는 위대하시도다)를 두 번 반복하여 외치곤 한다. 아랍 사회에서 구호제창(연호)은 대개 두 번 반복을 한다. 이것은 확실한 다짐, 재확인의 의미를 지닌다.


때로는 “비르 루흐 빗 담므”( بالروح بالدم, 혼으로 피로써)를 연호하기도 한다. 이 말이 때로 사랑고백에도 사용되기도 하지만, 시위 현장이나 투쟁의 자리에서는 “우리의 혼과 우리의 피로 되갚겠다”는 식의 피의 보복의 다짐이 된다. 어떤 무슬림들이 자신들의 피 갚음의 정당성을 알라에게서 찾는 행위인 셈이다. 그런데 이런 표현의 뜻을 글자대로 이해할 필요는 전혀 없다. 결사항전, 마지막 한 사람 까지 하는 식의 구호가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반정부 시위 현장에서도 외쳐지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주어가 없는 표현들?


나를 주어로 사용하지 않을 때, 그 표현은 모호하기만 하다. 허례허식이나 자신을 감추거나 포장을 하는 것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책임회피에 익숙한 말투나 행동이 자주 눈에 띈다. 이것을 보여주거나 엿볼 수 있는, 아랍어 표현의 독특함이 있다. 주어가 없는 표현이다. 컵을 깨고도 ‘컵이 떨어져서 깨뜨러졌어’한다. ‘문이 망가뜨려졌어 “ 하는 식이다. 자기 사람이나 자기 가문이나 자기를 맹목적으로 두둔하거나 옹호하는 것에 익숙하다. 강한 척, 아는 척, 있는 척한다.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는 것을 힘들어한다.


물담배 용품점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  ©김동문


아랍 이슬람 지역에 살면서 이런저런 모양으로 아랍식의 표현에 익숙해지고 그것을 이용하기도 했다. 어떤 헤어짐이 못내 아쉬운 자리에서 현지인들이 “우리 다시 만나야지” 하면 '인샤알라'로 답을 하거나, “이 일 확실하지?”하는 질문을 받을 때면, '왈라히'로 반응하던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약속 시간에 늦으면서도 조급하지 않았다. ‘예, 아니오’를 분명히 밝힐 때 혹시 겪을 수도 있는 번거로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행동이기도 했다.


어떤 면에서 아랍인들이 다양한 형식으로 ‘알라’의 이름으로 명세를 하며 자기 책임을 피하려고 한다면,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앞세워 자기 자신의 책임을 감추는 것만 같다. 확실하게 말하지 않는 것은 종종 거짓 맹세와 자기변명으로 이끌곤 한다. 경건한 표현으로 넘쳐나는 어휘 안에 스스로 져야 할 책임을 감추는 것이다. 거짓이 스며들 틈을 제공한다. 맹세에 익숙하면서도 소홀한 아랍인들이나 지나치게 맹세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여주는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도전을 안겨주고 있는 것 같다.


문득 '거짓말' 그거 뭘까? 생각한다. 아랍 사회에서 종종 겪는 뻔한 거짓말의 다수는 누군가를 해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미안함을 드러낼 용기가 없어서, 자기 부족한 모습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둘러대는, 습관화되기도 한, 변명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또한 나의 형편을 알리고 싶지 않을 때도 거짓말을 한 기억이 난다. 요르단을 떠나기 전, 현지인 지인을 만나곤 했다. 그때 지인들이, "다음 주 금요일 집에 와. 양고기 바비큐 먹자"는 말에, 나는 '인샤알라'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아직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나는 거짓말쟁이다. 남을 해치기 위한 가짜 뉴스와 왜곡된 주장, 혐오가 늘어가는 지금, 거짓말은 무엇일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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