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이 박사를 찾았다. 下
- 각 작품은 각기 다른 이야기입니다. 뭐랄까. 멀티 유니버스 같은 거죠. -
- 이번 작품은 저의 이전 중편소설과 견련성을 갖습니다(https://brunch.co.kr/brunchbook/dongnoya) -
3.
"전 세상이 박수 쳐주는 꿈들을 빨리 이뤘어요. 제가 열심히 살아간 대가였지요. 근데 신기한 게, 어떤 순간부터 수많은 것들이 제 어깨 위에 싸그리 올라와 있었어요. 무거웠어요. 모든 게 싫증 났어요. 그래도 참고 더 많은 걸 손에 쥐었지요. 그러면 더 행복해질 거라 맹신했으니까요. 다들 그렇게들 살아가니, 나라고 특별한 게 있겠나 싶기도 했지요."
이 박사는 미간을 한껏 꾸기며 자신의 관자놀이를 연신 꾹꾹 눌러댔다.
"근데 아니었어요. 쥐고 있는 게 많아질수록 짜증만 많아졌고, 뭔지는 모르겠는데 그것들이 더 멀리 도망간다는 느낌만 들었어요. 그래서. 다 놓았습니다. 일단은 마냥 가벼워지고 싶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기부를 많이 했어요. 수많은 기술을 개발하며 돈을 찍어내던 제 연구소도 아무런 조건 없이 모교에 넘겼죠. 가지고 있던 기술도 좋은 곳에 사용될 수 있게 특허들도 거의 다 이전했고요."
"그러고 나니까 좀 개운해지셨어? 이 박사 당신도 결국 뻔한 말을 하네."
"억지로 어깃장 안 놓아도 됩니다. 강 주임님 당신도 이미 이 이야기를 알고 있을 테니까요. 아니다. 이미 느끼고 있다는 게 더 정확하겠네요."
이 박사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그리고 이 박사의 육신도 커지고 있었다. 이 기괴한 공간을 빠져나가고 싶다. 이 박사가 소리를 지른 탓일까, 아니면 이 박사의 광기가 무서워서일까. 심장이 빨리 뛰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무너질 것 같다.
"솔직히 당신 후회하지? 돈이 없어지면 그때야 알잖아. 넘치도록 많은 돈이 개똥철학도 하게 만들어준다는 걸. 돈을 버린 결과가 지금 미쳐버린 당신인 거잖아?"
"아닙니다. 참으로 아닙니다. 손에 쥔 물질들을 던지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지요. 하지만 본능적으로 알았지요. 부족하다. 닿았지만 부족하다! 알 것 같은 그 간지러움! 그래서 저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기로 했어요."
"아무것도 아니게? 너랑 말장난이나 하고 있을 시간 없어."
"그럴 시간이 없다기에는 강동노 주임님은 제 이야기를 그저 잘 듣고 있네요? 아까 제가 했던 질문에 답만 하시면 모든 게 끝나는데, 그것조차 답을 안 하고 계시잖아요. 출구의 손잡이를 당신이 쥐고 있는데, 어째서 문을 안 여시는 거죠?“
"그... 그건..."
"간단해요. 강 주임님은 오늘이 지났을 때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기에, 쥔다는 게 의미가 없을 거라는 사실을 이미 알기에, 어쩌면 오늘이 행복해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걸 알기에. 저의 질문을 끝내고 싶지 않은 겁니다."
사실이다. 내 목소리에는 문제가 없다. 다만 이 박사의 질문에 답하고 싶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는 이 박사의 질문이 나를 간질간질하게 만들고 있음에, 기묘한 감감을 느끼고 있다. 이 감각을 놓치면 어느날 일상에서 떠오른 좋은 생각처럼 되찾을 수 없을 것 같다. 점점 더 어지럽다.
"강동노 주임님.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끝까지 들어주세요. 어차피 당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니까요. 전 아무것도 아닌 무(無)의 존재가 되기로 했어요. 돈이 아닌 것들도 버리기 시작했죠. 배우자와 자녀들과도 인연을 끊었어요. 친구들도 마찬가지고요."
"가족을 버렸다고?"
"가족도 처음에는 절 설득하려 하더군요. 근데 제가 몇 년 피해 다니고. 줄 재산도 아예 없다고 하니, 더는 저를 찾지 않더군요. 처음에는 슬펐지만. 점점 더 가벼워졌어요. 천륜이라는 가족도 버릴 수 있더라고요. 참 신기하죠?"
"그건 무책임한 거잖아. 가족을 어떻게 버려? 가족만큼은 달라야 하잖아."
"무책임이요?"
이 박사의 이번 표정은 엄청난 고민에 빠진 철학자의 표정이었다.
"유레카! 맞아요.강 주임님이 아주 중요한 부분을 짚어내셨네요. 무책임! 역시 우리 강 석사! 맞습니다. 무책임이 저에게 행복을 주었어요."
가족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잘 계실까. 이가 많이 안 좋으시던데. 아버지는 괜찮으실까. 요새 점점 치매 증상이 심해지고 계시던데. 요양보호사를 어떻게 써야 할까. 더 늦기 전에 결혼을 해서 손주를 보여드리는 게 도리이지 않을까.
"난 그럴 수 없어. 가족만큼은, 절대로 그래서는 안 돼. 이 박사 당신도 인간이잖아.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어? 도리라는 게 있잖아."
"맞아요. 인간은 그럴 수 없어요. 그래서도 안 되고요. 하지만 저는 인간을 넘어서야 했어요. 모든 걸 버리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서 저 언덕 너머로 나아가고 싶었어요. 그래야 살 것 같았어요."
이 박사는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등을 긁으려 했다. 다만 이 박사는 팔이 등에 닿지 않아서 버둥버둥 대기 시작했다. 다만 이 와중에도 이 박사의 표정은 오르가즘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늙은 남자의 오르가즘을 느끼며 버둥대는 모습이라니. 다만. 역겹지 않다. 오히려 황홀경에 빠진 이 박사의 표정은 거룩하기까지 했다. 다만 내 몸이 끝도 없이 지하로 끌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이 박사. 그만하면 안 될까? 너의 질문에 답을 내가 당장은 못하겠어. 그래. 그건 인정할게. 근데 나도 사정이라는 게 있어. 이 박사 당신이 그걸 좀 배려 좀 해주라... 내가 너무 힘들어서 그래."
이 박사는 따뜻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봄 같은 미소였다. 이 박사는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 박사는 나에게 다가와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그렇다면 질문을 좀 바꾸지요. 제 질문에 정직하게 답을 해주신다면, 강 주임님의 제안을 깔끔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고마워. 너한테 고맙다고 말하는 게 짜증 나지만. 그래도 고맙다."
"강동노 주임님은 이제 다 그만두고 싶지요?"
4.
이 박사는 녹차를 입에 털어 넣었다.
"솔직히 답해주시기만 하면 군말 없이 강 주임님 말대로 하겠습니다."
"내가 뭘 믿고?"
"가끔은 근거 없이 그저 믿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게다가 강 주임님은 제가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 박사를 감옥에 보낼 수도 없고 흠씬 두들겨 패서 어디에 묻어버릴 수도 없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러고 싶지 않다. 이 박사의 말에서 무언가가 나에게 닿았다. 그게 뭔지 궁금하다.
"강 주임님은 제가 부러우시죠? 저처럼. 아무런 일도 없이, 또 아무런 짐도 없이. 그렇게 아무런 '나'도 없이. 그렇게 살고 싶으신 거죠?"
"질문은 하나만 해."
"하하하. 강 주임님이 대답을 안 하시니 질문이 길어지는 겁니다."
"그래. 맞아. 너가 부러워. 너가 부러워 미치겠어. 부럽다고 이 새끼야! 나도 해야 할 일들이 있어서, 어깨 위에 올라탄 게 많아서, 그래서 이러는 거야.“
"부러울 게 뭐 있나요. 강 주임님도 최선을 다하셨을 텐데."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고! 당장 내 눈앞에 있는 걸 어떻게 외면하냐고! 내 위에 얹어진 것들을 어떻게 버리냐고!"
이 박사는 텅 빈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 박사의 눈에 맺혀있는 감정은 연민도 동정도, 호기심도 아닌 심드렁함이었다.
"해야 할 일은 끝도 없어. 높으신 분들 눈치도 봐야 하고, 부모님도 만족시켜 두려야 해. 결혼도 해야 하고, 집도 사야지. 하기 싫어도 해야 해. 그래야만 한다고.“
"왜요?“
"너한테는 우습겠지. 거지 같은 직업도, 말도 안 되는 월급도, 부모님이 늙어가는 것도, 날 떠난 연인도. 쓰레기 같지만 싹 다 싫어. 근데 신경을 쓰고 살아야 해. 왠지 알아? 이것들마저 잃어버리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니까."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라.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요?"
"시끄러워! 너 같이 넘치도록 여유 있는 새끼들이 매일 말 하는 개똥철학들이 왜 역겨운지 알아? 너네는 이미 완성품이거든. 너네는 이미 다 쥐고 있거든. 나 같은 인간들은 쥔 게 아무것도 없어. 일평생을 너희들이 보기에는 같잖은 것들을 한 번이라도 쥐어보려고 살아. 그렇게 아등바등 사람 구실 좀 해보려고 열심히 산다고. 근데 이걸 다 버려? 그 순간 난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무것도?“
"그래! 아무... 아무것...도..."
몸에 기운이 모두 빠져나갔다. 정신이 이곳에 있다는 느낌도 없었다. 갑자기 모든 게 다 생경하게 느껴졌다. 이 박사는 양팔을 벌리고는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이 박사는 나를 안아주었다. 저항할 힘도, 의지도 없었다. 몸이 무너졌다. 시야가 흐릿해졌다. 이 박사는 나의 등을 토닥여준 뒤 자신의 주머니에서 포스트잇을 꺼내 내 손에 쥐어주었다. 의식이 흐릿해진다.
"강 주임님은 역시 저 너머로 가는 법을 알고 있군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이 박사는 사라지고 없었다. 이 박사가 나에게 준 포스트잇에는 짧은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나는 너다. 그리고 너는 내가 된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열람실에서 나왔다. 어지럽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라이터에 불이 잘 붙지 않았다. 겨우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아들였다. 깊게 깊게 빨아들였다. 뱉어 버린 연기까지도 빨아들였다. 열람실로 돌아 들어갔다. 새삼 겨울의 추위가 다시 느껴진다. 이 박사의 흔적이 붙어있는 벽에 손을 댄다. 손끝에는 벽의 거친 표면이 느껴진다. 손바닥에는 콘크리트 벽의 냉기가 닿는다. 이마에는 열람실 안의 차가운 먼지가 느껴진다. 모든 게 느껴진다. 살아있다는 게 생경하지 않았다.
5.
"팀장님. 여기 확실히 좀 이상하죠?"
"그러니까 말이다. 벽에는 테이프 찌꺼기만 가득하고. 낡아빠진 나무 책상과 의자는 중구난방으로 흩어져있고."
"근데 특이한 거는 또 없네요."
"그러게 말이다. 강 주임이 진짜 여기로 온 거 맞아? 너한테 이 박사인지 이 석사인지 그 새끼 여기 있다고 말한 다음 뛰쳐나갔다며."
"네 맞아요. 저도 어떻게 숟가락 좀 얹어 보려고 바로 여기로 출발 왔는데.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이상하다. 설마 강 주임이 이 박사한테 칼 맞고 그런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요."
"아이씨. 모르겠다. 어디 있겠지 뭐. 너 담배 있으면 하나만 주라."
"여기 실내인데요?"
"이 새끼야! 실내도 실내 나름이지. 이 정도 되는 곳이 무슨 실내냐?"
"근데 저 담배만 있고 라이터가 없는데."
"넌 어떻게 담배 핀다는 놈이 라이터도 안 들고 다니냐?"
"죄송합니다. 라이터 안 나오길래 아침에 버렸는데. 제가 당장 나가서 사..."
"야! 저기 창틀에 담배 팩 하나 꽂혀 있네. 저거 한번 뒤져봐라."
"네! 갑니다요! 오. 팀장님. 진짜 담배 팩에 라이터 하나 들어있네요. 역시 팀장님의 육감이라는 게 대단하셔. 어!?"
"왜? 고장났냐? 하긴 이런 곳에 멀쩡한 라이터가 있을리가 없지."
"아니요. 그게 아니라. 담배 팩 안에 포스트잇이 말려 있는데, 빳빳한 게 최근에 쓴 거 같은데요."
"헛짓하지 말고 빨리 가자. 우리 빨리 돌아가야 해."
"팀장님. 이거 글씨체가 강 주임이 쓴 거 같은데요?"
"확실해? 뭐라고 썼어?"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이 글을 누가 읽고 있으실까요. 저를 찾아온 동료 주임님이실까요? 아니면, 뭔가 문제가 생겼기에 찾아온 경찰이실까요. 아니면 아무도 이 글을 읽지 않게 될까요. 그게 뭐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건 제가 남긴 지금의 '나'의 마지막 말입니다. 많은 걸 떠나려 합니다. 무엇을, 언제, 어떻게, 떠나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여러분도 이곳에 닿는다면 누구도 시키지 않은, 당신의 그것으로부터 잘 떠나셨기를 바랍니다. 부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행복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