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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토해야만 살 수 있다. 上

사원이 아닌, 학교 후배 김지유는 오빠라고 부르며 대화를 이어 나간다.

by 동노야

10화. 토해야만 살 수 있다. 上

- 각 작품은 각기 다른 이야기입니다. 뭐랄까. 멀티 유니버스 같은 거죠. -



직장인으로 열심히 살다보면,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지?’


이때 스스로 어떤 답을 채택하느냐에 따라 하나의 직장인으로 남을지, 한 명의 인간으로 존재하게 될지가 결정된다.


1. 작품명 '회식'. 자! 대리 역할에 몰입하시고... 레디... 악숀!


[Scene 1. 정신건강에 좋지 않다]

17:48. 정신이 든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했던 기억은 나는데 출근하고 업무를 보다 보면 정신을 잃는다. 문득 내가 진짜 기절했던 건 아닐까 고민해본다. 목 뒤가 뻐근하고 모니터 앞 엑셀이 묘하게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걸 보면 나는 출근을 해서 9시간 정도 일을 한 게 맞다.. ‘아. 이제 곧 집에 간다.’ 스멀스멀 웃음이 나온다. 윗사람들이 빨리 퇴근해야 최대한 정시퇴근을 할 터이다. 은폐, 엄폐 후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본다. 사무실 벽면에 붙어있는 월간계획표가 보인다.


오늘은 회식이 있다. ‘아. 열 받는다.’ 회식을 하는 이유가 뭐였더라. 하여튼 뭔가 명분은 있었다. 명분이 기억나질 않는 걸 보면 이번 회식은 말이 안 되는 명분으로 개최되는 회식이다. 이 명분으로 정당을 창당 했다면 헌법재판소에서 헌법 재판관 전원의 찬성으로 정당해산이 될 만큼 최악의 명분이었다는 기억만 어슴푸레 남아있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회식 때마다 수당을 줬으면 좋겠다. 참여자 절대 다수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회사 조직의 실질적인 통제 아래 있는 시간이니 이건 분명히 근로시간으로 인정 되어야 한다. 가끔 나도 모르게 하는 멍청한 생각이다.


정신을 차리고 회식 장소를 확인한다. 곱창집이다. 난 곱창을 못 먹는다. 그러나 간다. 왜냐? 모르겠다. 그건 고민 안 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 더욱 놀라운 지점은 회식 장소를 내가 잡았다는 사실이다. 이유는? 역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조직 생활에서 합리성을 찾기 시작하면 정신건강에 좋지 않다. 까라면 까고, 나다 싶으면 하고, 해도 되나 싶으면 하지 말고, 이것까지 해야 하나 싶으면 해야만 한다. 그래야 나의 정신건강에 이롭다.


[Scene 2. 회식은 최종적으로 GDP 상승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회식 중 대화는 대개 쓸 데라고는 전혀 없는 말들이다. 과장님은 케이블 프로그램의 랩 배틀 경연대회에 나가는지 이유도 없이 열을 내며 온갖 욕설을 뱉으신다. 과장님의 말을 들어보면 주식, 펀드, 부동산 등 어떤 내용들을 술술 말 하는 것 같지만 결론은 하나다. 손해를 봤지만 그건 자기의 잘못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렇게 경제부총리처럼 한반도의 모든 경제정책에 대해 논하던 과장님은 어느새 직원들에 대한 비판을 시작한다. 정확하게는 비난이다. 요새 어린 여직원들이 아무 것도 할줄 모르고 너무 여리다는 내용이다.


술에 잘 취하지 않는 편인 나에게는 이런 대화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거 누가 찍어서 인터넷에라도 올리면 우리 다 작살나겠다.' 시대를 역행하는 과장님의 발언을 듣다 보면 이게 바로 역사의 흐름을 거역하는 반동 쿠테타 초입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난 혁명에도, 반동 쿠테타에도 참여하지 않기 위해 잠시 얼빠진 사람처럼 온몸에 기운을 빼고 곱창을 뒤집는다. 곱창은 이미 다 익었고 가스버너까지 이미 꺼진 상태지만 열심히 뒤집는다.


과장 이하 일동 역시 병든 비둘기 마냥 고개만 꾸벅꾸벅 하며 "구구구" 대신 "암요 암요. 그렇고 말구요. 지당타당하신 말씀이며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격언들입니다" 라는 느낌의 대사들을 다양한 단어로 바꾸어가며 의미 없는 대답을 제조하고 있을 뿐이다. 회식 자리의 대화는 생산성이라고는 전혀 없기 때문에 GDP 상승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회식 자리에 지출하는 돈은 GDP 상승에 기여하겠지만, 이로 인해 정신적 타격을 입게 되는 하급자들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노동생산성은 추락할 것이며 이는 최종적으로 GDP 성장세 둔화로 이어진다. 경제의 단기 양적 성장에 덧없음을 느낀다.


생각해보면 회식 중 대화가 쓸모가 있을 때도 있다. 과장님의 방언에 가까운 이야기를 듣다가 누군가가 순간적인 애드리브로 더 나은 반응을 보인다면 그는 과장님의 총애를 얻는다. 이걸 기가 막히게 해냈던 팀장님은 동기들에 비해 빨리 승진을 해낼 수 있었다. 엑셀조차 다루지 못 하는데 말이다. 승진을 위한 대도무문의 길에 업무 능력이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나도 대도무문의 길을 걸어 보리라 곱창의 곱을 바라보며 각오를 다진다.


[Scene 3.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회식은 계속된다. 그리고 언제나 그러했듯 회식은 참 요지경이다. 회식 시간은 참석자 중 최상위 직급자를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분명한 업무 시간의 연장이다. 와이셔츠 소매를 걷고 술을 마시며 사담을 나누지만 회식자리에서 참여자들은 과장, 팀장, 대리, 사원이라는 직급에 맞게 적절한 업무 행동을 하게 된다. 회식이라는 행사는 일종의 잘 만들어진 대학로 연극 같은 현장인 것이다. 팀장은 회식에서 팀장이 해야 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대리는 대리로서 회식에서 해야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근데 신기한 점은 회식 자리 최상위 직급 몇몇은 술을 마신 후 이런 역할극에서 벗어나 사회적 연기를 때려치우고 '인간 정상명'으로 자신의 본연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구체적으로 그 시작은 주로 누가 되었든 하급자가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과장님에게 주제를 불문하고 과거 경험을 물어볼 때가 그 시점이다. 이때부터 과장님은 자신이 경험했던 속내와 욕망으로 점철된 그때 그 시절 잿빛 느와르 영화를 묘사하기 시작한다. 그 구체적 내용은 대개... 아니다. '퉤!' 침을 뱉는 것 정도의 문장으로 내용을 갈음한다. 나쁜 이야기에 집중해봐야 내 마음만 아프다.


과장 정상명이 아닌 인간 정상명의 본질적 자아 상영 시간은 계속된다.물론 그 누구도 이 정도까지의 내용을 요청한 적은 없다. 과장님께 예전에는 어땠는지를 물어본 자를 색출해내고 싶지만 어쩔 수 없다. 어차피 하급자가 회식에서 해야만 하는 역할이 이 질문을 하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옛날에 TV 예능 프로를 보며 뻔한 질문을 하던 MC를 욕했던 적이 있는데 반성한다. 모두가 어쩔 수 없는 애환이 있다는 사실을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이 배운다. 어쩌면 회사 회식은 몰래카메라가 아닐까 생각한다. 진심으로 대화를, 정확하게는 술주정이라는 형식을 통해 본인의 본질적 자아를 발산하는 최상위 직급 한 사람을 두고, 나머지 참가자들은 주어진 역할을 수행한다. 계산대 쪽에 몰래 카메라를 오래 진행했던 한 MC가 있지 않을까 살펴보지만 아닌 것 같다. 이것도 나의 멍청한 상상이다. 이런 상상이라도 해야 회식 시간을 버틸 수 있다.


과장님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휴대전화 화면을 확인한 과장님이 "시이벌"이라는 대사를 읊는 걸 보니 송신자는 사모님이리라. 과장님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자세를 바로하고 통화에 임한다. 모르고 보면 신성한 제사에 임하는 제사장처럼 보일만큼 자세가 가지런히 하다. 과장님이 입을 여신다.


"응!응! 어디긴 어디야♡ 안 그래도 빨리 가고 싶어서 마무리 하려 했지!"


하트라는 기호를 넣으면 문장이 경박해진다는 사실을 알지만, 이 모습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하트 기호를 제외할 수 없다. 오히려 안이 채워진 하트 기호(♥)가 아닌, 속이 텅 빈 하트기호(♡)를 씀으로써 과장님의 텅 비어버린 진정성을 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역시 언어는 진화하고 있음을 느낀다.


여하튼 과장님의 통화 중에 하급자들은 모두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 마냥 입을 다물고 원래 조용히 허공을 바라본다. 이런 자리의 공기는 조금 누렇게 뜬 회색이다. 그런 색이 뭔지는 정확하게 지적할 수 없다. 난 적녹 색약이니 괜찮다는 자기위로를 하며 나도 멀뚱멀뚱 누런 공기를 바라본다. 과장님의 통화가 종료 되었다. 그 순간 이름 모를 요정이 우리들 뇌에 "땡!" 이라고 외치고 도망간 듯 모두가 다시 입을 열고 움직임을 재개한다.


그렇게 과장님은 귀가하셨다. 아마도 집에서는 좋은 아빠, 말 잘 듣는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하셔야 하니 떠나시는 거겠지. 이런 모습들을 보면 사는 건 참 어렵다. 그러나 우리의 회식은 끝나지 않는다. 팀장님이 수컷들끼리 한잔 더하자고 남자 직원들을 강제 징용한다. 학부시절 노동법 강의에서 들었던 남녀고용평등과 일ㆍ가정... 하여튼 이름이 굉장히 길었던 그 법에는 사업주가 근로자에게 성별 등의 사유로 합리적인 이유 없이 채용 또는 근로의 조건을 다르게 하거나 그 밖의 불리한 조치를 하지 말라고 적혀 있었던 것 같다. 그게 무슨 상관이 있으랴. 팀장님의 저 당당하고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비릿하면서도 시대에 맞지 않은 멘트를 들으면 적법성을 고민하는 걸 그만두게 된다. 법 보다는 팀장님의 권한이 더 강하니까. 하여튼 입영통지서를 받았을 때처럼 기분은 더럽고 짜증나지만 어쩔 수 없으니 끌려간다.


군화를 신은 것처럼 발이 무겁다. 그리고 내가 생각한 그 법이 여기에 적용도 안 될 것이란 창피함이 몰려온다. 어려워서 활용할 수 없다면 그저 내 잘못으로 치부한다. 그래야 마음이 편해진다. 오래 전 어떤 청년이 근로기준법을 지켜달라고 절규하였으나 50년이 지난 지금의 현실은 그저 그렇다. 법은 정교해지고 종류도 다양해졌으나 현실의 권력이라는 건 여전히 강력하기 때문이다. 슬프고도 현실적인 이야기이지만 인간은 현실의 권력에 약하다. 시대를 짊어지려 했던 영웅들도 있어왔고 법이라는 체계도 좋아졌지만 현실은 여전할 뿐이다. 나의 법적지식은 그렇게 성장을 포기한 지 좀 됐다. 구체적으로 내가 취직하고 4시간 만에 포기한 셈이니 나의 직장생활은 무법천지의 역사였으리라.


과장님이 떠나면 몰래카메라 시즌2가 시작된다. 이번 주인공은 과장님 다음 상위 직급자인 팀장님이다. 팀장님은 팀장이라는 직급의 역할 연기를 때려치우고 본질적 자아를 진솔하게 보여준다. 팀장님은 일장연설을 시작하신다. 분량은 많지만, 부질없는 말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추정을 하게 된 사유는 내가 대화를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 대리가 회식에서 해야 하는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며 초롱초롱한 눈을 유지하고 '(존경의 느낌이 들도록 상체는 숙이고 박수를 친다)' 따위의 대본 속 지문을 훌륭하게 해냈을 뿐이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원 최성우는 눈이 풀려있다. 연기 몰입도가 아직 낮은 일반 사원이기에 자신이 누구인지, 이 자리의 의미는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저 친구는 얼마 안 가 퇴사할 것 같다. 회식이라는 잘 짜여진 연극 속 자신의 역할에만 몰입 하면 되는데 성찰을 하려 하면 이런 덧없는 자리를 못 견디기 때문이다. 똑똑한 친구였는데 안타깝다. 아. 똑똑한 친구니까 못 버티는 걸까. 세상사 성찰을 하면 어려워진다.


순간 팀장님의 말이 끊겼다. 팀장님의 침묵은 회식을 마무리 하고 싶어 한다는 시그널이 아니다. 다만 자신이 준비한 이야기가 잠시 맥락을 잃자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 맥락을 되짚고 있는 중이다. 버퍼링이 걸린 이 순간이 기회다. 이 지점을 치고 들어가 다음을 기약하는 '아디오스' 따위의 대사를 외쳐야 이 빌어먹을 회식자리가 끝난다. 나는 단전에 힘을 주고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게 침을 서너방울 삼키고 입을 열어 대사를 뱉어낸다.


"크하하핫! 팀장님 진짜 재미있으시다. 핫!핫! 아이구야... (왠지 그윽하게 팀장님을 바라보며) 팀장님. 오늘은 이쯤 하시죠. 과장님 내일 또 새벽 같이 출근하실 텐데. 나머지 이야기는 진짜 궁금하니까 내일 점심 때 해주세요"


팀장님은 아이처럼 밝게 웃으신다. 만족하신 모양이다. 이쯤 되면 회식을 마무리 하자는 멘트를 칠 수 있다.


“자자. 오늘은 이쯤합시다!“


회식을 마무리해도 좋다는 팀장님의 외침과 미소를 바라보니 나 역시 행복해진다. ‘고객님의 미소가 저희의 행복입니다.’라는 문구를 회사 CS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여튼 난, 해냈다.


연말에 사내 아카데미 영화제가 있다면 나는 남우주연상을 받을 확률이 매우 농후하다. 대리가 회식에서 해낼 수 있는 이 엄청난 역할을 너무나 깔끔하게 수행했기 때문이다. 수상 소감으로는 "저는 다 계획이 있었습니다." 정도가 좋겠다. 나는 정신이 이미 혼미해져 있는 사원 최성우를 데리고 택시를 잡으러 뛰쳐나간다. 사원 최성우를 이때라도 안 데리고 나가면 사원 최성우는 내일쯤 퇴사를 할 거다. 그러기 싫다. 사원 최성우가 퇴사하면 수많은 잡일들을 내가 해야 하고 "요새 것들을 근성이 없어!"라는 클래식한 본부장님의 대사를 들으며 또 다른 회식이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택시를 붙잡으려 대로에 나온다. 콜택시처럼 일반 택시를 호출할 수 있는 어플리케이션으로 택시를 잡는 게 빠르겠지만 나는 길가에서 손을 흔들며 택시를 찾는다. 택시 어플리케이션을 다시 설치하는 게 짜증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매번 택시 어플리케이션을 설치하고 지우고를 반복한다. 나는 왜 매일 택시 어플리케이션을 삭제하는지 스스로를 탓한다. 와이파이가 안 잡힌다. 결국 와이파이가 아닌 데이터를 켜고 택시 어플리케이션을 설치한다. 설치가 완료되고 택시 어플리케이션을 실행하려 하니 때마침 택시 한 대가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대체 왜 매번 데이터로 택시 어플리케이션을 다운 받고 나면 그 즉시 그냥 도로가에서 택시가 잡히는 걸까.


한두번이 아니다. 택시 기사님들은 멀리서 허둥지둥 어플리케이션을 설치하는 나를 보고 껄껄 웃으며 기다리다가 40초쯤 지나면 일부러 내 앞에 오는 건 아닐까 고민한다. 멍청한 생각이다. 나는 택시 탈 일이 없으니 내일쯤 또 어플리케이션을 지우겠지. 이건 비용처리 안 되려나. 사실상 업무 중에 발생한 불가피한 비용인데. 집어 치우자. 팀장님이 나온다. 나는 얼른 택시 뒷문을 열고 은근슬쩍 팀장님의 엉덩이를 무릎으로 찍어 택시 뒷자석에 팀장님을 구겨 넣는다. 어렸을 적 본 프로레슬링에서 링 밖으로 상대선수를 던져버리는 액션을 취하고 싶지만 참는다. 택시 뒷문을 닫고


“풍납 1동이요!”


행선지를 기사님께 말씀 드린다. 자세한 주소는 팀장님이 가다가 술 깨면 말씀하시겠지 뭐. 나의 번뇌만큼의 각도인 108도 쯤 허리를 굽히며 우리 팀장님 집에 잘 들어가시라고 인사를 드린다. 나는 회식 시작 3시간 만에 처음으로 나의 본질적 자아가 나와 진심으로 웃는다. 나는 상급자가 되면 저렇게 되지 말자고 하지만, 점점 저 모습을 닮아가는 나를 발견하고는 한다. 이 생각도 집어 치운다. 회사와 관련된 자아성찰의 끝은 언제나 별로이니 말이다. 이렇게 세상 불필요한 회식이 끝난다.



2. 안녕하세요. **기업 인사과 '대리' 강**입니다.


[Scene 4. 토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세상이 돈 건지, 내 머리가 돈 건지 중간과정은 다 생략하고 정신을 차리니 나는 '짜잔' 하고 집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재빨리 옷을 벗고 방문을 열었다. 에로틱한 전개를 기대했겠지만 그런 전개는 없다. 내가 열어젖힌 문은 화장실 문이고 격렬히 벗겨낸 건 변기 덮개였다. 토를 해야겠다.


"읚어으아어윾... 읍! 흒! 으어어어 흵!!!"


억지로 손가락을 입에 집어넣어 회식 중 먹은 물질을 토해낸다. 헛구역질 대비 실제 구토 수가 증가하게 되면 나의 정신은 조금 더 맑아지고 속도 괜찮아진다. 이걸 그래프로 그려 보... "읚어으어윽 으아아아 " 다시 구토를 한다. 인간의 목구명과 혀의 모양, 구강구조를 통해 뱉어낼 수 있는 소리가 이렇게 다양할 수 있다는 점 역시 새삼 놀랍다. 한글 창제 시 누군가의 구토 장면도 한글 창제에 한몫 했으리라는 반민족적 생각도 해본다.


토하지 않으면 저녁에 편히 잘 수도, 내일 아침 정상적으로 출근할 수 없다는 사실은 나에게 물리학적 진리값이다. 유레카. 언제부터인가 스스로 깨우친 사실인데, 회식 후 억지로라도 토해내야 속이 부대끼지 않고 잘 수 있다. 그리고 토한 직후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 들 때 침대에 누워야 귀척거리지 않고 15초 안에 잠들 수 있다. 그리고 구토를 잔뜩 해야 다음날 머리가 안 아프다. 예배가 끝나면 아멘을 외치고, 회식이 끝나면 우웩을 외친다. 이로써 나의 하루 업무가 종료된다. 한 마디로, 토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아침이다. 신기하게도 제시간에 일어난다. 샤워를 하고. 혹시 남아있는 잔무가 있는지 확인하듯 다시 손가락을 입에 넣고 구토를 시도한다. 뭔가 갑갑하지만 토할 거리가 남아있지 않다는 판단이 든다. 다행히 나는 구토라는 업무를 훌륭히 해낸 것 같다. 출근 지하철에 몸을 얹는다. 물론 앉을 자리는 없다. 그리고 회사 가기 싫다.


회식 때 너무 무리한 건 아닌지 생각한다. 회사 앞 약국에서 술 깨는 약을 달라고 해야겠다. 성분이나 그런 건 모른다. 그냥 먹는다. 많이 배운 사람들이 좋다고 만들었으니 효과야 있겠지. 그러나 최근에는 구토를 하고난 후에도 몸이 너무 무겁다. 항상 숙취인 것처럼 힘이 없고 의욕도 없고 머리도 아프다. 토할 게 남아있는 것 같다. 아침에는 체내에 남은 토할거리가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나의 몸은 격렬히 구토를 원하고 있다. 회사에 가면 약을 먹고 한번더 손가락을 입에 넣어 구토를 시도해야겠다.



[Scene 5. 나도 그러하다. 그러나 그러하다고 말하지 못한다]

유야무야 점심이다. 역시 몸 상태가 좋지 않다. 사원 최성우가 나에게 커피나 따로 한 잔 하자며 불러낸다. 표정이 좋지 않다. 고등학교 시절 저런 표정으로 누가 나를 불러내면 아주 높은 확률로 나를 때리고 돈을 빼앗았다. 지갑에 얼마쯤 있나 확인해본다. 7천원 있다. 이 나이에 삥 뜯기는 건 좀 민망하기에 통 크게 한 잔 사는 척 계산을 한다. 결과적으로는 안 맞고 돈을 빼앗긴 격이니 나에게는 이득일까. 어찌되었든 나는 아이스 캐러멜 마키아토, 사원 최성우는 이탈리아어쯤으로 생각되는 언어로 구성된 요상한 프라프치노. 7800원이었다. 가지고 있는 돈이 좀 부족하다. 난 원래 단 거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주입하고 나의 선택을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바꾼다. 7000이 되었다. 야호.


사원 최성우가 입을 열었다. 회사가 너무 힘들다는 말이었다. 이 회사에 들어올 때 좋았단다. 맞긴 맞는 말이다. 우리 회사는 소위 말하는 '좋은 직장'에 들어간다. 정년도 보장되고 2020년 대한민국 노동자 중위소득의 2배 가까운 월급을 받는다. 근데 사원 최성우는 너무 힘들다는 말을 한다. 사원 최성우의 불평불만 타임이 시작된다. 사원 최성우는 자신이 회사에서 하는 수많은 잡일들이 왜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쓸모없는 일들이고, 그나마도 잡일 하나를 끝내면 또 다른 쓸모없는 일이 끝없이 몰려온다는 말을 한다. 게다가 그런 쓸모없는 일들을 하고 퇴근하면, 대개 저녁 9시는 가뿐히 넘기 때문에 자기 시간을 가질 수도 없다고 사원 최성우는 화를 낸다. 화는 점점 고조된다. 분노의 휘모리 장단으로 나아간다. 얼쑤.


사원 최성우는 스스로에게 선물을 하고 싶어서 비싼 옷도 사고, 게임기와 많은 게임 타이틀도 샀다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불행하다는 말을 하며 사원 최성우는 마시지도 않은 요상한 프라프치노를 휘젓는다. 안 그래도 몸도 안 좋은 나에게 사원 최성우가 저런 불평불만을 늘어놓는다는 점에서 짜증이 난다. 난 최근에 스스로에게 선물조차 안 하고 사는데 말이다.


그래도 나는 차분히 듣는다. 난 고민 토로의 자리라는 연극에서 착한 대리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음. 근데. 사원 최성우가 묘사하는 자신의 일상들이 내 이야기이기도 했다. 나도 저런 고민을 계속 해왔다. 정확하게는 고민을 해왔는데 이제 그 고민 자체가 그냥 일상이 되어서 고민처럼 안 느껴진다. 다만 사원 최성우의 이야기를 들으니 신선하다는 느낌이 든다. 나에게는 워낙 익숙한 존재인데, 누가 갑자기 그 존재를 묘사하기 시작하면 새삼 생경하게 느껴지는 그런 이상한 감각 말이다. 사원 최성우가 같은 고민을 적어 놓았던 나의 일기들을 훔쳐본 건 아닐까 고민해본다. 정신을 차리고 사원 최성우를 달랜다. 사원 최성우의 잡무를 나도 조금 나누어서 해야겠다. 안 그러면 사원 최성우는 회사를 그만둘 거고, 그가 하던 모든 잡무들을 내가 해야 하니까.


대충 달래고 업무에 복귀한다. 또 속이 안 좋고, 머리가 아프다. 화장실로 들어가 손가락을 입에 넣어 토를 해본다. 점심 때 먹은 것도 다 토해낸다. 탕수육도 먹었는데 잘 안 씹었는지 건더기가 그대로 나온다. 요새 오른쪽 어금니가 많이 아파서 잘 못 씹는다. 신경치료를 받고 싶다. 근데 바빠서 못 간다. 신경치료를 받고 나면 몇시간 정도 발음도 잘 안 되고, 치료 중 몸이 긴장을 많이 하게 되어 남은 하루 일과가 참을 수 없이 피곤해진다. 그래서 나는 신경치료를 미루고 있다. 이렇게 나도 늙어가겠지. 승진하고 남 눈치 덜 보게 되면 그때는 치료를 꼭 해야겠다.



[Scene 6. 욕값/월급의 비율에 대한 고찰]

그렇게 오후가 시작되고 폭풍 같은 두 시간이 지난다. 한 사람이 사무실로 진입한다. "야이 씨발년아!" 그 사람은 우리 팀 막내인 사원 김지유에게 다짜고짜 욕지거리를 한다. 산업안전보건법에서 이러지 말라는 내용이 담겼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그러나 법의 보호를 받기 위해서는 보고절차를 거쳐야 하며, 변호사를 구입해야 하며, 나는 어딘가에 끌려다녀야 한다. 법이라는 그럴싸한 보호를 받기 위해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 지난한 일들을 많이 겪어야 한다. 그러나 “씨발년.”이라는 음성과 공포는 지금 당장 존재한다. 언제나 그러했듯 말이다. 나든, 사원 김지유든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씨xx’은 아니지만 고객님들의 씨xx으로서 즉각 대답하고 반응해야 한다.


일단 상황이 안 좋은 것 같아서 사원 김지유를 고객으로부터 격리하여 안전을 확보한다. 그리고 내가 고객 응대 자리에 앉아 상담을 진행한다. 아마 욕을 시작하겠지? 정답. 욕을 시작한다. 나의 월급 총액 중에 욕값이 얼마일까. 나의 임금 계산에 욕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시나 근로기준법 어귀에 욕값의 산정방법을 넣어보고 싶다. 욕값은 어떻게 계산되어야 할까. 일단 나의 월급 총액 중 욕값의 비중은 30%는 넘을 것 같다. 욕먹는 게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노동자는 욕먹는 일이 정기적으로 발생하는데, 이게 업무가 아니면 뭐가 업무일까. 투쟁.


욕을 시작한 고객은 자기가 사기를 당했다고 한다. 사원 김지유의 잘못으로 자기가 피해를 봤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차트를 살펴본다. 사원 김지유는 잘못이 없다. 어떻게 설명을 해볼까 고민을 하다 고객의 얼굴을 잘 살펴보니 사무실에 종종 찾아와 욕지거리를 하는 유명한 진상 고객이었다. 이 사람은 그냥 욕이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행패를 자주 부린다. 언론은 이런 문제들은 보도 하지 않는다. 왜냐. 별 거 아닌 일이니까. 월급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당하는 일이니까. 근데 근무 중 심한 욕을 듣는 건 문제지 않나? 다시 고민을 접는다. 일을 빨리 끝내는 게 평범한 장삼이사 월급 수령자에게는 더 마음 편한 일이다. 나는 사원 최성우에게 경찰을 부르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조용히 앉아 계속 알 수 없는 말만 반복하는 고객님의 말에 “네. 네”라고 영혼 없이 답한다.


정성과 사랑을 다해 고객의 말을 경청해서 감동시키라는 진상 고객 응대법은 현실과는 먼 이야기이다. 분노와 이해할 수 없는 짜증이 가득 담긴 말을 경청하면 내 마음이 다친다. 그냥 욕설을 나의 마음에 안 담기 위해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 나의 정신건강에 좋다. “아까 그 씨발년 당장 잘라!”라고 소리 지르는 고객을 바라본다. 이쯤 되면 저 진상 고객님이 “사장 나와!”라는 고전 명대사를 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진상 고객님은 “책임자 나와!”라는 고성을 지른다. 우리의 진상 고객님은 이전보다 더 그럴싸한 단어를 잘 찾아낸 것 같다. 진상으로서의 역할이 한 단계 더 진화했다. 사내 아카데미 영화제 우정상을 저 고객이 수상할 수도 있다는 망상을 시작한다. 또 속이 안 좋다. 슬슬 저 고객이 등장하지 않는 다른 생각을 시작한다.


사원 김지유에게는 이런 일이 자주 있다. 사원 김지유가 일을 못하는 건 아니지만 겁이 많고, 성격이 급해서 자잘한 실수를 종종 저지른다. 사원 김지유가 대학을 갓 졸업하고 하는 첫 사회생활이라 그러려니 했지만 그 빈도가 잦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진상들이 찾아와 소리 소리를 지르는 이유는 사원 김지유의 외모적 특성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사원 김지유는 키가 작고, 목소리가 여리고... 다 차치하고, 사원 김지유 동안의 아담한 여성이다. 그러다 보니 사원 김지유는 진상 고객들의 주요 타깃이 되었고 지금처럼 소리 소리를 지르는 민원인들은 자석에 끌리는 것처럼 사원 김지유 앞으로 가게 된다. 이런 일이 잦다 보니 사원 김지유는 오히려 자신감을 더 잃게 되고 실수도 많아지는 악순환에 빠졌다.


또한 사원 김지유는 사람이 워낙 순해서 이기적인 동료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사원 김지유에게 '툭툭' 준다. 말 그대로 '툭툭' 준다. 이기적인 사람들은 업무를 다른 이에게 넘길 때 “이걸 왜 제가 해야 하죠?”라고 되묻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일을 툭툭 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기적인 사람들은 사람이 순한 사원 김지유에게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일을 진짜 툭툭 준다. 내가 옆에서 오늘 본 것만 4건이다. 그 중 3건은 분명히 사원 김지유가 받아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난 가만히 있었다. 자신의 업무에 이기적 타인들의 부탁까지 더해져 일상 업무가 과중해진 사원 김지유의 실수는 이렇게 점점 더 늘어간다.


사원 김지유의 애환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상식의 정규 분포선을 벗어난 사람은 고객만이 아니다. 직장 내에서도 사원 김지유는 희롱의 대상이 된다. 나이 지긋한 팀장, 선임대리 등이 사원 김지유에게 돌아가며 끊임없이 농을 붙인다. 주말에 뭘 했는지, 왜 어제랑 옷이 똑같이 입고 왔는지, 연애는 하는지, 회식 때 자기 옆에 앉으라는 등, 이것 외에도 성희롱을 포함한 사원 김지유에 대한 괴롭힘은 끝이 없다. 희롱의 내용은 조금씩 달라지지만 공통점은 모두 비릿한 불쾌함이라는 느낌과 사원 김지유의 당황이라는 결과뿐이었다. 어떻게 사원 김지유의 상황을 그렇게 잘 아느냐고? 좋아하는 거 아니냐고? 아서라. 사원 김지유는 나의 대학교 2년 후배이기도 해서 앞뒤 상황을 잘 알 뿐이다.


놀랍게도 사원 김지유. 아니. 학교 후배 김지유는 대학교 시절에도 같은 고통을 겪었다. 교수님들에게, 취업을 잘 했다는 이유 하나로 후배들을 불러내던 선배들에게 지금과 비슷하게 당해왔다. 그때의 나는 교수님들에게 “최근 불거진 교수에 의한 학생 성추행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시냐.”는 등의 누가 봐도 협박성 경고인 말도 했었고, 선배들에게는 “그딴식으로 하지 말라”고 대거리를 한 적도 있었다. 그때의 나는 용기가 있었다, 참 착해서 그런 문제상황에서 어버버 당황만 하는 한 명의 인간 김지유를 보호해줄 만큼 난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때의 나에게 교수나 선배는 어차피 안 볼 사람이니 내가 정의를 운운할 정도의 용기를 낼 수 있는 환경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과거에 젖어들면 술에 더 취하지만 지금의 현실을 보면 술이 깬다. '인간' 김지유가 아닌, '사원' 김지유를 나는 보호할 수 없다. 지금의 사원 김지유는 상사들과 이상한 고객들의 희롱에 '네..네..’만을 반복한다. 사원 강동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회사라는 공간은 그런 곳이고 사원 김지유가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면 나의 반발은 스캔들로 번져, 나는 막내 직원한테 집적거리는 못난 대리로 낙인찍힐 게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원 김지유에 대한 희롱이 길어진다 싶으면 사원 김지유에게 업무 관련 질문을 하거나 아주 간단한 업무지시를 해서 그 희롱을 중지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나는 직장 내에서 딱딱하게 일만 하는 사람 정도로 인식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희롱상황은 빠르게 마무리 될 수 있었다. 그러고 나면 사원 김지유는 손톱을 물어뜯는다. 매우 불안한 모습으로 말이다. 대리 강동노는 그저 어디서 받았다고 둘러대며 사원 김지유에게 초콜릿 따위를 주며 이 사태를 마무리 한다. 마음이 안 좋지만 어쩔 수 없다. 어절 수 없으니까 어쩔 수 없다. 나의 잡생각이 이쯤 미쳤을 때 진상고객은 ‘실발’이라는 말과 함께 경찰과 떠났다. 또 얼마 뒤에 올 게 뻔하지만 일단 상황이 끝났으니 다행이다. 팀장님과 눈을 마주친다. 꼭 이런 일이 터지면 팀장님은 화장실을 간다. 그리고 귀신 같이 마무리될 때쯤 돌아오신다. 팀장님은 멋쩍게 웃음을 보여주신다. 대충 고생했다는 뜻이다.


사원 김지유에게 재무과에서 빌린 스캐너를 반납하러 같이 가자고 한다. 이런 일이 터지고 나면 사원 김지유도 그렇고 대리 강동노도 숨을 좀 돌려야 한다.


"김지유 사원님. 많이, 힘들죠?"

“아니에요. 오빠. 이제는 그냥 다 포기하고 그러려니 해요. 익숙해지지는 않는데, 견디는 건 좀 느는 것 같아요”


딱딱한 존댓말로 사원 김지유에게 말을 건 나에게 사원이 아닌, 학교 후배 김지유는 오빠라고 부르며 대화를 이어 나간다. 사원 김지유는 그저 괜찮다며 헤헤 웃는다. 보려고 본 건 아니지만 사원 김지유는 우울증 약을 먹는다. 사원, 아니 후배 김지유는 지난번에 술을 먹고 나한테 죽고 싶다는 말을 한다. 참 뜨악하고 무서운 말이다. 나는 ‘그럴 만도 하지 않을까’라는 더 뜨악하고 더 무서운, 그리고 합리적인 판단을 했다. 나는 사원 김지유에게 뭐든 말을 해주어야 했다.


"지유아... 아니 김지유 사원님. 저도 그 때는 그런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근데 그냥 잊고 살게 되는 것 같아요"


나는 후배 김지유를 ‘김지유 사원님’이라고 불렀고, 이런 최악의 대답 경진대회 대상을 받을만한 대답을 했다. 난 이 공포와 불합리의 사회 속에서 ‘대리’ 강동노로 피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다. 언제나 대리 강동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침묵 속에서 사원 김지유와 스캐너를 반납하고 자리로 돌아온다. 어느덧 18시 52분이었다.


이럴 때면 자괴감이 든다. 어렸을 적 만화를 보면서 나는 항상 정의의 편이었다. 장난감을 사도 정의의 사도 장난감만을 샀다. 정확하게는 정의의 사도에 대해 관심이 없는 ‘차장’이자 아버지 강동노가 사주셨다. 어린 시절 나의 상식 속 정의는 항상 승리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가며, 사회생활을 하며 확신으로 바뀌는 의심이 있다. '정의가 꼭 이기는 것 아니다' 무겁다. 모든 것을 포기한 눈으로 나에게 자신의 고통을 읊조리던 사원 김지유의 얼굴이 떠오른다.


나는 퇴근하고 나와 혼자 멍청하고도 청승맞게 맥주를 한 캔 사서 잘도 냠냠거리며 거리를 걸었다. 한 캔을 비우면 한 캔을 더 사서 냠냠한다. 고민이 희미해진다. 속이 안 좋아지는 대신 머리의 고통은 줄어든다. 그러나 묘하게 현실적인 생각을 시작한다. 난 '대리' 강동노니까. 사원 김지유를 그냥 달래주자. 그것 외에는 회사문제에서 대리 주제에 할 수 있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언젠가 성공하면 이런 악습을 없애면 사원 김지유도 고마워할 거다. 기시감이 든다. 군대에서도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병장'이 되니 나도... 그만 하자. 고민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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