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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과 말 섞기

소소한 일상 #1

by 라라라


저는 음식을 정말 빨리 먹습니다. 아주 어린 꼬맹이 시절부터 그랬어요. 밥상에 차려진 맛난 음식들을 조금이라도 많이 먹으려면 21개월 어린 여동생과 경쟁을 해야 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숟가락과 젓가락을 쉴 여유 같은 것은 없었지요. 심지어 그 두 가지 도구를 한 손에 쥐고 자리를 돌려가며 사용하는 신박한 기술도 터득하게 되었답니다. 무슨 소리냐고요? 둘을 한꺼번에 손에 쥐고, 젓가락을 사용할 때는 숟가락을 엄지와 검지 사이에 살짝 걸쳐두었다가 숟가락을 사용할 때가 되면 재빠르게 둘의 위치를 바꾸는 겁니다. 그러면 밥상 위에 젓가락을 내려놓고 다시 숟가락을 집어 드는 시간을 절약해 반찬을 하나라도 더 빨리 먹을 수 있거든요. 저는 또래보다 덩치가 커서 (기골이 장대한 부모님 유전자의 영향입니다.) 동작이 조금 꿈 떴고, 동생은 상대적으로 작고 날렵했거든요. 그런 동생을 상대하려면 다양한 기술을 구사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그러다 보니 음식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어요. 음식이, 정확히는 식재료 하나하나가 말을 걸어온다는 걸 몰랐거든요. 눈을 마주치고 귀를 기울이면 김치 한 조각, 밥알 한 톨 한 톨이 재잘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걸 가르쳐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흐르고, '이제는 건강을 챙겨야겠다' 정도가 아니라 '조심하지 않으면 밥 숟가락 놓겠구나'라는 생각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심각한, 그러나 당연한 조언을 만날 때마다 들었습니다. 소금 섭취를 줄이고, 탄수화물 섭취도 줄이고, 채소와 과일을 좀 (제발 좀!!) 먹자. 그래서 결심한 것이 '샐러드 도시락을 만들어 먹자'였습니다.


마트에 가니 여러 가지 채소를 먹기 좋게 잘게 잘라 적당한 양으로 담아 팔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몸에 좋다는 올리브, 딸기, 블루베리, 견과류, 브로콜리, 삶은 달걀을 넣습니다. 단백질도 꼭 챙기라고 하니까 다이어트의 친구 닭가슴살도 구워서 넣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수제 치즈(처음에는 우유에 유산균 음료를 섞어서 전용 발효기에 넣어 만든 요구르트를 얹어서 먹었어요. 그런데 요구르트의 유당도 몸에 나쁘다고 해서 고운 채에 받쳐서 하루를 숙성시키면 만들어진 것을 먹습니다.)와 드레싱을 조금씩........ 이 아니고 넉넉하게 얹어 먹습니다. (이러니 살이 안 빠지지.)


그런데 문제는 샐러드가 처음에는 너무너무너무 맛이 없다는 겁니다. '이걸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주문을 계속 외우면서 젓가락으로 하나씩 집어서 입에 넣어 봅니다. 젓가락과 숟가락 한 손 쥐기 신공 따위는 이제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샐러드 도시락 안에 들어있던 재료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입에 넣기 전에 눈도 마주칠 여유가 생기기도 하구요. 그러다가 먼저 말을 걸어보게 되었습니다. "너 정말 몸에 좋은 거 맞냐?"라고 말이죠. 그러자 이 녀석들이 대답을 합니다. 아니. 대답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수다가 장난 아닙니다. "몸에 좋은 것뿐이겠어요?" "옆에 있는 건포도와 저를 같은 수준으로 보시면 섭섭합니다." "어제 논문 봤잖아요. 안토시아닌 함유량이 장난 아니에요" "아까 보니까 위층 브로콜리가 살짝 덜 삶아졌던데, 괜찮으시겠어요?" 심지어는 입에 넣고 씹는 동안에도 계속 재잘거립니다. "맛이..." "좋아..." "어떠...." "아 쫌..." 오물오물하다가 입을 조금이라도 벌리면 부서져가는 재료들이 내뱉는 조각난 단어들이 튀어나옵니다. 시끄러워 가급적이면 입을 벌리지 않고 먹게 됩니다.


하지만 늘 기쁜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기는 합니다. 이 녀석들이 늘 제 걱정을 해주거든요. 어제는 보이던 딸기가 오늘은 안 보인다. 슬라이스 올리브 가격이 올랐다던데 이젠 매일 못 만나는 거냐. 그 거무죽죽한 오리엔탈 소스 녀석은 좀 작작 쳐라.


하나하나 눈인사를 하고 잠시 귀를 기울이다 보니 먹는 속도도 눈에 띄게 느려졌습니다. 배도 금방 불러오는 느낌이구요. 진작 이 녀석들 말을 들었으면 영원할 것 같은 옆구리 살도, 혈관에 장기체류 중인 콜레스테롤 선생들도 함께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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