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잡아먹는 괴물에게
아주 오래전,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농담이 하나 있습니다. 아마도 예전에 즐겨 읽던 리더스 다이제스트 Reader’s Digest에서였을 겁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바쁜 현대인을 위해 중요한 사건에 대한 기사나 흥미로운 저술을 짧게 요약해서 전해주었던 정기 간행물이었습니다. (재미있는 단행본이었는데, 안타깝게도 한국어판은 2009년 12월 이후로는 발행되지 않는다고 하네요.) 그 잡지에는 짧지만 강렬한 농담들을 기사들 사이에 배치하곤 했습니다. 하나의 기사 끝에 편집점이 애매하게 끝나서 공백이 생길 때가 있었는데, 그곳에 적절한 길이의 유머를 삽입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저는 잡지를 받아 들면 먼저 그 유머들부터 찾아서 읽곤 했습니다. (참고로 출판사에서는 독자들로부터 유머를 투고받아서 게재했고, 채택된 원고에 대해서 1년 정기구독권을 선물했습니다. 저도 그런 독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 유머는 대략 이런 내용을 담은 대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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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우쭐대며 지난밤 꿈 이야기를 해 주었다.
친구 1: 이봐 친구. 내가 어젯밤에 굉장한 꿈을 꾸었다네.
친구 2: 무슨 꿈이길래 그래?
친구 1: 내가 말이야 꿈에서 예수, 석가모니, 마호메드 같은 성인들과 소크라테스, 플라톤, 헤겔 같은 당대 최고 철학자들을 만났지 뭔가. 그래서 그들과 철학적 논쟁을 벌였거든. 그런데 내가 그 유명한 성인과 철학자들을 모두 이겼다네.
친구 2: 아니, 그 심오한 사상들을 모두 말이야? 무슨 논리로 말인가?
친구 1: 아주 간단한 말이었어. "그건 다 니 생각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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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대화에서 이기는 법"이라는 책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누군가와 논쟁이 벌어졌을 때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서 반드시 적용해야 하는 전술들을 담은 짧은 책이었습니다. 그 책에서 제시한 첫 번째 방법은 바로 "상대방을 내 논리적 사고틀 안으로 끌어들여라."였습니다. 반대로 해석하자면 상대방 논리에 말려들면 안 된다는 이야기였죠.
언뜻 싸우는 방식을 결정하는 측이 전투에서 유리하다는 논리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저 방법에는 매우 중요한 전제가 깔려있습니다. 내 생각과 주장이 논리적으로 타당해야 하고, 허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완성도가 높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주장이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거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근거가 부족한 경우에는 싸워서 이길 확률(?)이 낮습니다.
"뭐라구요? 이길 수 없다가 아니고 이길 확률이 낮다고요? 그럼 이길 수도 있다는 말이네요?" 그렇습니다. 확률이 낮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논리적으로 타당하고 명확한 근거를 준비하지 말라는 이야기와는 전혀 다릅니다. 수학적 계산을 근거로 판단했을 때 확률이 높은 쪽을 선택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설명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내 생각엔 그게 아닌 것 같아'라고 느낄 때도 있겠지요. 하지만 잘 모르겠지만 아닌 것 같다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잘 모르는데 어떻게 아니라고 판단하는지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직감으로? 경험으로? 아니면 그냥? 하나님께서 세상을 그렇게 만들었을 리가 없다고요?)
수학자들과 이론물리학자들, 아니 모든 과학자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주장하기 전에 몇 가지 과정을 거칩니다. 먼저 추측을 합니다. 특정 자연현상이나 이전 연구자들이 제시한 방식으로 실험했을 때 나오는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그것은 이러이러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다음 가설을 세웁니다. 사고 실험을 통해 자신이 추측한 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단계입니다. 많은 가설들은 현실에서 구현하거나 현상을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 사고 실험은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됩니다. 다음은 모델링입니다. 가설이 수립되면 다양한 변수와 상황에서도 동일한 결괏값을 도출할 수 있는 정형화된 틀을 만드는 단계입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많은 법칙들이 여기에 속한다고 보면 됩니다. 마지막 단계는 검증입니다. 연구자 본인이 직접 수행할 수도 있고, 그를 시기 질투하는(?) 다른 연구자들이 달라붙어서 오류가 없는지, 모델이 예측한 결과를 실제 실험이나 관측을 통해서 나온 값들과 비교했을 때 유의미한 범위 내에 있는지를 확인하는 단계입니다. (여기서 제시하는 절차가 반드시 정답은 아닙니다. 천재들은 중간 과정들을 건너뛴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는(!!) 직관적 사고를 한답니다. 그러니까 천재이겠죠?)
모델링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요? 학교 다닐 때 강제로 외웠던 수학공식도 지긋지긋한데 내가 왜 수학적으로 사고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요? 이해합니다. 그럴 수 있지요.
그런데 과학자들이나 공학자들에게 물어본다면 모형이 세계를 작동시킨다고 말할 겁니다. 보잉 Boeing은 비행기를 만들기 전에 풍동 wind tunnel 모형을 이용합니다. 생물학자들은 인간 유전자를 이해하기 위해 단순한 초파리를 모형으로 삼습니다. 자동차 회사는 더미 Dummy라는 인형을 차량 충돌 실험에 이용해 차량 안정성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인정하기 정말 싫겠지만, 수학적 사고는 곧 상식입니다. 우유 두 개를 사 오라는 심부름에 마트에 갔는데, 한 개에 1950원 하는 우유를 두 개 한 묶음으로 3240원에 판다면 그걸 사겠지요. 도토리를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 주겠다니 화를 내다가,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 주겠다니까 좋다고 한 원숭이들을 비웃었겠지요. 하지만 당신은 '덧셈은 교환 가능하다.'는 수학적 법칙을 배제하고는 당신이 한 선택이 왜 합리적인지 설명할 수 없습니다.
물론 위대한 선조들이 만들어 놓은 것을 절대 의심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마치 내가 넘지 못할 거대한 벽처럼 느껴져 그 앞에서 절망한 경험이 있겠지요. 하지만 논리적 사고와 수학은 최소한 당신이 멍청한 선택을 하거나 대화에서 이야기가 안 통하는 사람 취급받는 것을 막아주는 장치가 될 겁니다.
그딴 거 난 모르겠고 난 내가 느끼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겠다고요? 스티브 잡스도 멍청하라 Stay foolish고 했다고요? 바보 Zone에 머물라는 책도 본 적 있다고요?
이해합니다. 어찌 보면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내가 이해할 수 없다고 그걸 쉽게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미지에 대한 공포'와 '무지에서 오는 불안'을 구분해야 합니다.
충심으로 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시간을 잡아먹는 괴물이여.
참고자료
닉 폴슨, 제임스 스콧, 노태복 옮김, 수학의 쓸모, 서울, 길벗, 2020.
조던 엘렌버그, 김영남 옮김, 틀리지 않는 법, 파주, 열린책들, 2016.
차동엽, 바보 Zone, 서울, 여백미디어,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