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글은 참고자료 따위는 없습니다.
그냥 '아무 말 대잔치' 정도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나이도 제법 들고, 조직 내에서 지위도 올라가고, 많은 사람들을 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상담을 해주어야 합니다. (찾아주어 기쁘기는 하지만 제가 상담사도 아닌데 왜 고민을 털어놓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 전문 분야 중 하나가 인터뷰라서 그런가요? 커피를 마시며 찾아오는 분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샌가 다양한 속내를 거침없이 제게 토해내곤 합니다.
처음에는 ‘이 사람이 왜 나에게 이런 이야기까지 하지?’라고 신기해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경험이 반복되고 누적되다 보니 '아, 이 사람은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구나.' 또는 '내가 이러저러한 측면에서 자기편이 되어주기를 바라는구나'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모로 부족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눠주는 사람이 너무나도 고맙습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다양한 주제를 던지면서 상대가 좋아하는 분야를 찾아내고, 그 안에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고민들을 자연스럽게 끄집어내려고 노력했습니다. 물론 항상 속으로 ‘꼰대처럼 굴지 말자. 그러면 안 된다.’라고 굳게 다짐하면서 말이지요.
찾아오는 사람들은 그 수만큼이나 성향이 다양하지만, 이리저리 추려보면 대략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냥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주기를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부류는 의외로 상대하기 까다롭습니다. 해답을 요구하지 않으니까 오히려 편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듣는 것은 거의 고문에 가까운 일입니다. (정신과의사나 상담사분들 존경합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간중간 상대방 생각을 정리해주기도 하고, 조금씩 관점을 바꿔주면서 이어갑니다.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이분들에게 조언은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저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급적 객관적인 관점을 유지하면서 또는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해법이나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상대방이 원래 고민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거나 내 조언과 전혀 관계없는 결론을 내리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면 상처만 남습니다. '난 지금까지 뭘 한 거지?'라는 자괴감과 함께 말이지요.
하지만 상처받을 필요 없었습니다. 앞서 정리해 드린 것처럼 그분들은 제게 자문을 구한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얽히고 섥힌 고민 뭉텅이에서 끄트머리 가닥을 끄집어내서 조금이나마 풀어 정리하는 것으로 족합니다.
두 번째는 뭔가 제게 바라는 것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뭐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물질적인 것을 직접 요구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단지 저를 우군으로 포섭해서 특정한 갈등상황이 발생했을 때 자기에게 힘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앞서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듣는 것이 힘들다고 했는데, 이 두 번째 사례도 만만찮습니다. 제일 난감한 경우는 이야기를 하다가 우는 상담자(?)입니다. (참고로 제가 제일 피하고 싶은 상황이 '우는 연인'을 만나는........)
상대가 제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이 무언가에 간절하고 감정적인 한계에 놓여있다는 직설적인 표현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귀찮아도 절대 그 상황을 얼렁뚱땅 마무리해 버리거나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경험이 없으신 분들은 꼭 기억하세요. 가급적이면 사전에 그런 상황을 회피하되 일단 불가피하게 맞닥뜨리고 난 다음에는 절대 수동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에게 상대가 처해있는 감정적 한계를 완화해 주는 것은 숭고한(무슨 맥락에서 숭고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의무이자 온 인류 중에서 그 순간을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입니다.
그런데 제일 안타까운 것은 제 고민을 들어주고 상담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자면 제 성격상 마음속에 품고 있는 고민을 절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절대 다른 사람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취약함을 드러내는 존재를 경멸해서도 아닙니다. 내가 가진 고민은 인간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과 대화(대화라고 쓰고 담판이라고 읽는다.)를 통해서만이 풀 수 있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사춘기 시절부터 말이지요.
저는 인생에서 무언가 선택하거나 중요한 갈림길에 섰을 때 그 어느 누구에게도 조언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 선택이 가져올 결과를 온전히 제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었지만, 돌이켜보면 그 갈림길에서 어떤 방향을 골라야 하는지 믿고 의지할 사람이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네요.
최근에도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사실 제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어디론가 떠밀려 가고는 있는 것 같은데, 그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 어디론가로 가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요소들이 필요합니다. 목적지, 방향, 길, 이유, 방법(수단)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런 것들이 없다면 아무 곳으로도 갈 수 없습니다. 물론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거대한 조류에 떠밀려 흘러가겠지만 그걸 내가 간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요.
만일 내가 그 요소들을 선택할 수 있다면 무엇이 좋을까요? 그냥 여기 머물러 있을까요? 아무 곳에도 가지 않고 말이죠. 하지만 여기에 머무는 것에도 이유가 필요합니다. 나를 포함한 모든 존재 存在 being는 이유가 있으니까요.
옛사람들은 존재라는 것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꾸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깃덩어리에서 흙으로, 흙에서 식물로, 식물에서 동물이 먹는 먹이로 말이죠. 그래서 존재 이후, 즉 죽음 이후에도 또 다른 삶이 있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 간절함이 신을, 신앙을,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신 神이라는 존재에 대한 애착은 옛사람들 삶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실제 소유하고 있는 것이나 소유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것에 대한 애착이 매우 강합니다. 특히 그것이 삶에 필수적일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과 비교하게 되면 애착은 다른 차원으로 변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물리적으로 동일한 형태와 질량, 성분을 가지고 있다 해도 '내 것'이라고 인식하게 되면 그 순간 특별한 의미 意味를 부여하게 됩니다. 그것이 삶에 필수적이지 않아도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그 존재는 매우 특별해집니다. 가벼운 예를 들어 볼까요?
연인과 함께 초여름 아침 해변을 걷고 있습니다. 머리카락을 헤치고 이마로 파고드는 아침 햇살은 조금 따갑습니다. 하지만 발에 밟히는 모래들 사이로 스며 나오는 바닷물은 딱 기분이 좋을 만큼만 차갑습니다.
느릿느릿 모래와 바닷물에 번갈아 발을 담그던 그 사람이 갑자기 허리를 굽히더니 작은 돌멩이 하나를 주워 들고 무심히 바라봅니다. 이리저리 돌려보고 돌멩이를 든 손을 올려 해를 향해 비춰보기도 합니다. 그 돌멩이가 마치 투명한 유리구슬이나 보석인 듯 말이지요. 그러더니 불쑥 "자, 선물이야. 잘 간직해."라며 당신에게 그 돌멩이를 건넵니다. '아침부터 귀엽게 구네.'라고 생각하며 당신은 "고마워" 한 마디 하고 돌멩이를 손에 쥡니다.
아침 산책에서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머리에 물기를 말리며 침대 머리맡에 올려둔 그 돌멩이를 쳐다봅니다. 아까는 몰랐는데 빛이 올라타는 방향이 달라지면 색이 조금씩 달라지는 알록달록한 녀석입니다. '잘도 발견했네.'라고 생각하고, 아침을 사러 나간 그 사람이 돌아오기 전에 머리를 마저 말립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니 못 돌아온 거죠. 멀지 않은 상점가에서 빵과 커피를 사서 돌아오는 길, 좁은 해변도로를 걷는 커플을 피하다가 맞은편 차선을 달리던 차와 충돌했습니다. 그 충격으로 핸들이 급격히 꺾여 해안가로 떨어졌습니다. 그리 높지 않은 언덕이었지만 그 사람은 차에서 나오지 못했습니다. 당신에게 돌아오고 싶었지만 찌그러진 핸들이 가슴을 파고들어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제 당신에게 남은 것은 그 사람이 아침 해변에서 건넨 작은 돌멩이 하나입니다. 참 볼품없는 유품입니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흐르는 눈물 때문에 돌멩이가 더 반짝입니다.
이 볼품없는 돌멩이 대신 그 사람 손을 잡을 수 있다면. 돌멩이 대신 그 사람이 내 곁에 존재했으면 하고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존재에 대한 생각 중 몇 가지 범하기 쉬운 오류들이 생각납니다.
어디엔가는 있겠지만 여기 없다면 존재하는 것일까?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데 실제로 존재하는지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그것은 믿음인가 희망인가 바램(바람이라고 써야 하지만)인가.
바램이라는 단어는 바람을 잘못 표기한 것입니다. 원래 '바라다'라는 동사 원형에서 어간 語幹인 '바라'에 명사로 만들어 주는 접미사 'ㅁ'이 붙은 '바람'이라고 써야 합니다.
하지만 '바람'은 기압 차이에 의해서 공기가 흐르는 '바람'과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비표준어임을 알지만 '바람'이 아닌 '바램'을 더 좋아합니다. '바람'이라고 쓰면 내가 기원하고 꿈꾸는 것들이 바람처럼 한 순간 내 곁을 스쳐 날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거든요.
'바램'이라고 쓰면 '바람'에 작은 말뚝 하나('ㅣ')를 박아두었기 때문에 어디에도 가지 못하게 붙들어 둘 수 있을 듯한 느낌이 듭니다.
물론 내 소원이 바람을 타고 저 멀리, 내가 닿지 못하는 그곳, 그 사람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는 내가 모르는 곳까지 날아간다면 '바람'이어도 좋겠네요. 아니면 더 높은 곳까지 날아올라 신께 다다를 수 있다면 더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