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라라 Jul 14. 2023

출발이다. 첫 날(1부)

여행을 떠나보자.

공항이 주는 얕은 긴장감은 늘 반갑습니다. 낯선 사람들로 가득 찬 공간이어서 그렇고요. 평소에 사용하던 것과는 느낌이 사뭇 다른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 아니 언제든 외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즐겁습니다. 두렵지 않냐고요? 아뇨, 전혀. 만일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공용어에 속하지 않고 내가 그 이외의 언어를 사용할 줄 모른다면 당연히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겠지요. 하지만 셀 수 없는 많은 대화를 통해 몇 개 이상 외국어에 노출되었던 경험이 누적된다면 그런 두려움은 시간에 비례해서 반감하는 법입니다. 더구나 상대도 모국어가 아니라 익숙하지 않은 외국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다음부터는 오히려 내가 가지고 있는 자신감 총량이 긴장감과 두려움보다 많아집니다. 그러면 굳어졌던 입꼬리 근육이 서서히 풀리면서 비로소 미소라는 것을 만들어냅니다. 그것도 아주 어색한 모습으로 말이죠. 마치 태어나서 처음 미소를 지어보는 얼굴입니다.


공항이라는 공간은 참 신기하고 독특합니다. 마치 마블 영화에 나오는 멀티버스 같아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세상에 공항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곳은 없습니다. 커다란 기차역이나 복합버스터미널이 비슷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뭐가 멀티버스 같냐고요? 잘 생각해 보세요. 멀티버스 속에는 여러 우주들이 서로 중첩되어 존재합니다. 서로 중첩되어 있는지도 사실 모르면서 존재하고 있지요. 공간과 공간 사이를 넘나들려면 특별한 목적과 기술이 필요합니다. 공간을 넘다 드는 기술을 알고 있다고 해도 함부로 옮겨 다니면 전능한 존재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심한 경우에는 이곳도 저곳도 아닌 특정한 공간에 붙들려있어야 합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거나, 문제가 없다는 인정을 받아야만 그 공간에서 풀려날 수 있습니다.


실제 공항은 다양한 구역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낯선 곳으로 떠나는 사람들과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 서로 얽히고 설혀서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출국장. 설렘과 슬픔이 한꺼번에 버무려져 무엇인지 알기 어려운 감정이 가득 차 있는 곳입니다. 아무리 같이 왔어도 누구는 떠나고 누구는 돌아가야 하는 경계선. 떠나는 이들은 문지기처럼 지키고 있는 무서운 제복 입은 사람들 뒤로 사라집니다.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반복적으로 허무하게 손을 흔들어 댈 뿐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물론 속으로 ‘드디어 갔다!’라며 소리 없는 환호성을 외치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다음에 두고 보자. 속마음 다 들린다고!! 다음번엔 절대 헤어지지 않을 거야!)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로 내려가면 정반대 기운이 넘쳐나는 입국장이 있습니다. 난생처음 밟아보는 공간으로 발을 내딛는 사람도 있고, 너무나도 돌아오고 싶었던 익숙한 공기를 폐부 깊숙하게 들이켜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리적으로(시간도 물리학 영역이니 여기에 넣겠습니다.) 정신적으로(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격언이 있으니까.) 오래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불안한 눈빛과 기대 가득한 눈빛을 모아 한 곳 만을 바라봅니다. 문이 한번 열렸다 닫히면 다소 지쳤지만 새로운 기운을 빨아드릴 것 같은 표정을 한 사람들을 조금씩 토해냅니다. 그러면 이곳저곳에서 처음 들어보는 이름들이 웃음소리와 함께 터져 나옵니다. 마치 복권을 사놓고 내가 기다리는 숫자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같습니다. 내가 가진 숫자와 일치하는 공이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공간에서 튀어나오면 저절로 환호성을 지르게 됩니다. 아니다. 선물을 가득 싣고 있지만 루돌프가 없어서 썰매를 직접 힘겹게 밀고 나오는 남녀노소 흑백황갈 다양한 산타들. 그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가족친지 썸남썸녀 꼬마들이 만나는 공간일 수도 있겠네요.


출국심사장은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요단강이요 아케론강입니다. 엄청난 뱃삯을 뱃사공에게 주고서야 그 강을 건널 수 있습니다. 심지어 내가 돈을 지불하고 배를 타기로 한 그 사람이 맞는지 몇 번이고 확인을 합니다. 평소에는 아무도 들여다봐 주지 않는 내 얼굴을 그렇게 꼼꼼하게 대조합니다. 그러고 나서 길게 줄지어 기다리다 맞이하는 검색대. 그 앞에서는 내가 가진 모든 무거운 짐과 소중한 것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심지어 외투나 겉옷도 벗어야 합니다. 겨우 몸을 가릴 수 있는 얇고 가벼운 옷가지만 허락됩니다. 그리고 나면 뭐 하나 몸에 숨겨둔 것이 없는지 물어봅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면 굳건한 개선문 같이 생긴 놈 건너에서 누군가 이리 오라며 몽둥이 같은 걸 흔듭니다. 두근두근 왠지 모를 불안감을 억누르며 건너갑니다. 여지없이 날카로운 소리와 붉은색 등이 켜집니다. 시꺼먼 몽둥이를 흔들던 그 사람이 이제는 발레 선생님이 되었네요. “자~ 두 팔 벌리고 알라스꽁(드)(A la Second)!” 얌전한 발레 수강생이 되어 따라 합니다. 아까 그 몽둥이로 무섭게 몸 구석구석 훑으며 내 자세를 교정해 주네요. 이제 관문이 하나 남았습니다. 이게 마지막입니다. 내 얼굴과 티켓을 다시 확인하고, 지문과 얼굴 사진까지 찍습니다. 조금만 틀어지거나 여권 구석이 작게 접혀있어서도 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접힌 모서리를 펼쳐 다시 스캐너에 올려놓고 나서야 신호등 불빛이 파란색으로 바뀝니다. 이제 다른 세계로 떠날 준비가 얼추 다 되었습니다.


아까는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고 강요하더니 이제는 뭐 필요한 것이 없냐며 길게 늘어선 상점들이 유혹합니다. 평소에는 내 수입에 과분할 정도로 비싼 것들이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겨우 몇 퍼센트 세금만 덜어냈을 뿐인데 횡제 하거나 득템 한 기분이 들 정도로 저렴해 보이는 이유는 뭘까요. 이 향수는 그녀에게 선물하면 좋아할 것 같고, 저 스카치 싱글몰트 위스키는 아버지가 평소에 좋아하시던 거고, 아이고 200미터까지 방수되고 세라믹 베젤을 갖춘 스위스 오토매틱 시계가 이 가격이라고? 여기는 면세점이라는 간판을 단 천국인가. 아니다. 우리 동네 새로 문을 연 베트남 음식점에서는 7000원에 푸짐하게 고수를 올려주는 쌀국수가 13000원이라고? 가진 자에게는 천국이요 없는 자에게는 고통이 끊이지 않을 지옥일지니. 카트를 밀고 구석으로 가서 아침에 챙겨 온 빵을 생수로 목을 축여가며 씹어 넘깁니다.


이제 나를 새로운 지구로 데려다줄 차례를 기다립니다. 이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엉뚱한 곳에서 차례를 기다리면 안 됩니다. 모두 똑같이 생겼지만 수십 개 탑승구들 중에서 내 이름을 불러줄 곳은 단 한 곳입니다. 시간도 맞춰 가야 합니다. 너무 일찍 찾아가도, 지나치게 늦어도 나를 들여보내주지 않을 겁니다. 배가 아파 화장실에 가다가도 혹시 들어갈 차례가 되지 않을까 조마조마 시간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아까 들었다 놨다 했던 손목시계가 눈앞에 아직 아른거려 돌아가 다시 한번 가격을 물어보고 싶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조금 있으면 내 손에서 떠날 줄 모르고 24시간 내내 무언가 알듯 말듯한 메시지들을 쉼 없이 토해내던 휴대전화도 꺼야 합니다.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친구에게 전하지 못한 메시지가 있으면 어쩌나 불안해집니다. 내가 세상과 단절된 사이에 모두 나를 잊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괜한 망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갑니다. 내가 탄 비행기가 엉뚱한 곳에 내린다거나, 몇 시간이 아니라 몇 년이 지나버려 모두 내가 죽은 줄 알았다는 드라마가 현실이 되어 버리면 큰일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조급한 사람은 나만이 아닌 듯합니다. 어디 숨었는지 모르는 스피커에서 누군가 낯선 이름을 애타게 부릅니다. 어미새가 무리에서 떨어져 길 잃은 아기오리를 찾듯이 애가 탑니다. 아예 깔끔한 제복을 차려입은 어미새 몇 마리가 직접 찾아 나섰습니다. 000 씨를 찾습니다. 미스터 000, 대만에서 오신 000 씨는 40번 탑승구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내 이름은 아니거든요. 살짝 부럽습니다. 누군가 저리 애타게 찾아주니 말이에요. 나도 일부러 옆 탑승구 앞 의자에 몸을 숨겨볼까 하는 장난기가 아주아주 잠깐이지만 들었습니다. 훠이훠이 쓸데없는 상상을 보이지 않는 손으로 흔들어 몰아냅니다.


이 공간에는 무수히 많은 탑승구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극소수 선택받은 자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성스러운 라운지라는 곳도 있습니다. 유리도 아니고 두꺼운 벽으로 번잡스러운 공간과 분리된 고귀한 영역입니다. 화려하게 장식된 입구에는 선택받은 자와 선택받지 못한 자를 구분하는 베드로 같은 사람이 알듯 말듯 미소를 얼굴에 담고 서 있습니다. 저는 선택받았습니까 하고 물어보니 평소에 얼마나 많이 세상에 베풀었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신용카드라는 것을 요구합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엉뚱한 곳에 쓸데없는 기부를 너무 많이 했답니다. 그래서 선택받지 못했다고 저를 돌려보냅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슬쩍 귀띔을 해주네요. 착실하게 올바른 곳에 베풀면 브이아이피라는 자격을 얻어 선택받게 된다고 말이에요. 말도 안 되는 다짐을 하게 만듭니다. 그래 진작 매우 중요한 사람이 되었어야 해. 나는 아직 그저 그런 사람이었어. 열심히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것들을 사 모아서 매우 매우 중요한 사람이 되어야지 하고요.

매거진의 이전글 왜요? 왜 어디론가 가야 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