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동무 잘 만나자.
새로운 여행지로 떠납니다. 어떤 여행이나 같은 곳을 향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번에는 방학을 맞아 고향 베를린으로 돌아가는 유학생 한 명이 옆 자리를, 그 뒤로는 똑같은 색과 모양을 가진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세르비아 수구선수들입니다. (몰랐는데 수구가 영어로 water polo이군요. 넓은 등짝에 Serbia Water Polo라고 써 있네요. 덩치만 봐도 수구선수들인 거 잘 알겠어요.)
혈기왕성한 수구선수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서로에게 이야기합니다. 내용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제가 세르비아어를 알 턱이 없잖아요. 같은 팀 선수에게, 그것도 하필이면 제 좌석에서 바로 대각선 뒤쪽에 있는 친구에게만 모두들 몰려들어서 쉴 새 없이 쏟아냅니다. 며칠 전 한국에서 있었던 경기 이야기일까요? 승패를 가를 수 있었던 결정적인 찬스를 놓친 이유와 다음에는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는 다짐을 코치에서 하는 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였다면 경기가 끝나고 디브리핑에서 했어야 마땅하겠지요. 그럼 무슨 이야기일까요? 서로 다른 선수들이 번갈아가며 찾아와서 웃어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걸로 봐서는 가슴 아픈 패배에 대한 소회를 나누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혹시 도착하면 뒤풀이는 어디에서 할 건지, 아니면 내가 실수한 것을 부모님에게는 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인지, 아니면 이번 원정경기를 치른 대가로 수당이 언제 얼마나 지급되는지, 아니면, 아니면, 그저 12시간이 넘는 비 행시간이 너무 지겨워서 몸도 풀 겸 서서 시덥잖은 농담을 끊임없이 던지는 걸지도 모릅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행위입니다. 인간이 발화하는 목적은 물론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사적인 공간에서 행하는 발화는 대부분 자신이 품고 있거나 느끼고 있는 감정을 서로 나누기 위한 것입니다. 서로 감정을 표현하는 행위는 다른 사람보다 더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느끼는 감정은 다시는 경험하지 못할 정말 소중한 순간입니다. 그 감정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내가 당신을 이만큼 중요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어요”라는 걸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과 함께하는 이 순간, 이 우주에서 단지 우리 둘만이 경험한 유일무이한 찰나가 되겠지요. 그걸 만들고 싶은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 순간들이 씨실과 날실이 되어 쌓이고 겹치고 누벼지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색을 가진 추억이라는 천이 됩니다.
한 순간 감정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품고 있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라면 더 진지해집니다. 그래야겠죠. 말은 쉐리주를 담았던 오크통에 넣어 둔 증류주와 같습니다. 매해 조금씩 천사가 자기 몫을 가져가기 때문에 오크통 가득 채워두었던 양은 줄어듧니다. 양이 줄어든 만큼 가치는 높아지지요. 오크통은 증류주를 머금었다 토해냈다를 반복하면서 쉐리주와 오크가 가지고 있는 향을 증류주에 나눠줍니다. 결국 증류주는 매해 그 향이 더욱 짙어지고 풍미를 더해갑니다. 오래 품고 있던 생각도 그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에는 막연하고 모호하고 거칠었던 생각. 오래오래 담아둘수록 쓸모없고 덧없는 부분은 천사들이 거둬가서 정수만 남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과 함께한 시간들이 생각들을 흡수했다 토해내기를 반복하면서 색깔이 짙어집니다. 시간이 지나 이제는 병입하고 서로 잔에 따라 마실 때가 되었습니다. 발화하는 순간 그 풍미는 세상 어느 곳에서도 느낄 수 없는 독특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잘못 보관하거나 너무 오래 두면 술이 상하듯 생각도 변질되곤 합니다. 오래 숙성한 와인이나 위스키가 왜 비싼 줄 아세요? 처음에 오크통 10개로 시작했다면 해가 갈수록 상한 것들이 나와서 나중에는 남은 것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너무 오래 묵혀두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아시겠죠?
아니 그런데 이 세르비아 수구선수들은 숙성이란 걸 모르나? 지루해도 몇 시간만 참았다가 착륙하고 고국으로 돌아가서 좀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