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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라라 Sep 02. 2023

그냥 걷는다

그냥 걷는다.

마음을 쓰기 싫어 노트를 덮고 걷는다.

갈 곳은 정해둔다. 어디로 갈지 고민하는 사이 마음이 쓰이니까 비우고 걷는다.

걸으면 비워질 마음은 길에 놓아두고,

무심히, 실수로 떨어뜨린 척, 다른 이가 주워 소유가 바뀌어도 상관없을 마음을 길가에 떨군다.


강가 둔덕을 걷는다. 마음을 덜어내 물에 풀어 두려 걷는다.

언제든 몸도 함께 잔잔한 수면에 풀어서 멀리 흘러 떠내려 보내도 좋을 만큼만 걷는다.

강물 소리가 귓가를 간질이면 노래 불러 귀를 닫고 걷는다.

닫아도 열린 마음 구멍으로 생각을, 고민을, 상념을, 과거와 미래를 흘러 보낸다.

언젠가 바다에 닿으면 풀어진 마음을 생각을 모두어 걷는다.


섬 그늘을 걷는다. 파도치는 오후 끼니를 때우고 배불리 걷는다.

걷다 보면 내 발자국이 눈에 밣힌다.

내가 남긴 흔적을 내가 밟아 덮는다.

모래 먼지가 발에 묻는 것이 싫어 방파제를 걷는다.

언제고 다시 오고 싶다고 마음에 새기며 바위 둔덕을 밟는다.

파도소리를 귀에 담고 싶어 아슬아슬 길어깨를 밟는다.

언제고 내게도 파도가 치기를.


돌아갈 길을 찾아 마음을 걷는다.

갈 곳을, 가야 할 때를 알아, 서둘러 걷는다.

이 길 위 내 곁에 그대 그림자가 드리웠으면 하고 걷는다.

그대에게 가지 않고 다른 이의 가슴으로 돌아 걷는다.

그대 고민에 내 마음이 아파 다리를 절룩 걷는다.

내 발가락 상처에 그대 마음이 몸져누운 곳으로 걷는다.

그대 방에 가둬놓은 마음을 풀려고 눈을 돌려 다른 이를 살펴 걷는다.

살아온 날들을 돌아 돌아 발자국 어지러운 내 마음을 걷는다.

걷다 돌아보아도 그대 마음이 아직 남아 뒤돌아 다시 걷는다.

짓이겨 밟아 걸어도 지워지지 않는 내 깊은 상처 꿰맨 자국을

실밥 풀어 선명한 골을 한 땀 한 땀 밟아 걷는다.

고름 짜내려 다시 일어나 먼 길을 걷는다.

상처는 더 큰 상처로 덮어 걷는다.

언제고 다시 풀어 봉합할 상처를 따라 걷는다.

지쳐 한껏 느린 걸음을 멈추지 않으려 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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