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상 #4
오늘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고 반포한 것을 국경일로 지정하여 기념하는 한글날입니다. 그래서 한글날을 맞이하여 문화유산 Heritage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참고로 문화유산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담은 다양한 영어 표현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Heritage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에 대한 논의는 뒷부분에서.)
젊은 분들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나이가 들어가면 주변의 모든 것들이 익숙해집니다. 삶을 유지하는데 필수 불가결한 음식은 물론이고 이생을 떠나지 못하게 나를 붙들어주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음악을 들으면 ‘아, 요즘은 이런 풍이 유행이네? 역시 유행이 돌고 도는구나.’라는 것을 느끼게 되고, 영화를 보아도 ‘이 장면은 옛날 그 명작에 나오는 장면을 오마주한 거네.’라고 시큰둥해집니다.
(다 아는 애들이네.......)
그런데 그냥 개인적인 느낌이 아니라 사회 분위기가 그런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서 문화 전반에 복고 열풍이 불어서 더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대표적으로 영화가 그렇습니다. 영화계에서는 마블과 디시 코믹스가 100여 년 가까이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왔던 만화작품 속 방대한 이야기를 하나씩 끄집어내고 있습니다. 제작기술이 발달하면서 이전에는 실사로 만드는 것이 어렵다고 여겨졌던 작품들을 생생하게 거대한 극장 화면에 옮겨줍니다.
그리고 더 이상 참신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 탓인지, 아니면 흥행이 보장된 작품을 만들고 싶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오랜 세월 잠들어 있던 영화를 리메이크하거나 후속작을 만들고 있습니다. 제 인생을 바꾼 영화 탑건 Top Gun 속편은 올해 가장 많은 관객을 모은 영화입니다. (아직까지는 말이죠.)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했던 작품은 2017년에 개봉했던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 2049였습니다. 1982년에 개봉했던 원작 영화는 필립 K. 딕 Philip K. Dick이라는 전설적인 SF 작가가 쓴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 “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영화감독을 꿈꾼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그냥 즐기는 수준이 아니라 배우 한 명 한 명이 보여주는 연기, 스토리 구성, 화면 연출, 카메라 기법, 각 장면에서 사용한 음악 등 다양한 관점에서 영화를 씹고 뜯고 맛봅니다. 그중에서 특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꾸고 있는 꿈과 미래를 구체적으로 시각화하는 것입니다.
‘생뚱맞게 무슨 꿈과 미래 이야기야?’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분명 있을 겁니다. 그리고 '아, 한글날 이야기는 언제 나오는겨?'라고 지루해하시는 생각이 제 귀에까지 들립니다. 조금만 참아주세요.
하는 일이 그렇다 보니 가끔 사람들 앞에 섭니다. 주제에 제한이 없을 때는 사람들에게 영화가 우리 인류 역사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때 제가 빼놓지 않고 예로 드는 작품이 바로 앞에서 언급한 블레이드 러너입니다. "왜 그 작품인가? 지금 보니까 촌스럽고 너무 어둡고 스토리도 개연성이 부족하던데?"라며 비평하던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듣기에 블레이드 러너는 영화사뿐만 아니라 실제 과학기술사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꼽힙니다.
먼저, 이 영화는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은 철학자들이 오래 고민해 온 주제들 중 하나입니다. 여기에서 영화는 이 질문을 한 번 더 뒤틉니다. '만일 생물학적으로 인간과 완벽히 동일한 안드로이드를 만들었는데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안드로이드는 인간인가?' '인간성을 상실한 인간과 인간성을 가진 안드로이드 중에 누가 진정한 인간에 가까운가?' 영화는 단순히 질문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과학기술이 더욱 고도로 발달해서 인간과 유사한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면 어떠한 안전장치가 필요한가를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한다는 숙제까지 던지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기술을 구체적으로 시각화해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면 당시 기술 수준은 물론이고 지금도 완벽하게 구현하기 힘든 다양한 첨단기술이 적용된 상품들을 보여줍니다. 날아다니는 자동차, 인간과 대화하는 맞춤형 AI, 증강현실로 구현되는 광고까지. 물론 일부는 원작 소설에서 제시된 콘셉트도 있지만 영화처럼 시각적으로 구현되었을 때 가져온 파장은 매우 큽니다. 실제로 블레이드 러너 이후에 제작된 실사영화, 애니메이션 등에서 미래의 모습을 다룰 때 대부분 이 영화를 참고하게 됩니다. (단적인 예로 블레이드 러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조명 기능이 탑재된 우산은 2000년 대 일본 애니메이션에 오마주처럼 자주 등장합니다.)
과장이 심하다구요? 많은 분들이 깨닫지 못하고 사용하는 주변의 모든 것들, 예를 들면 전화기, 텔레비전, 자동차, 컴퓨터 등은 실제로 상품화되기 오래전에 (당시 기준에서 첨단) SF 영화에서 시각화되었습니다. 한 편의 영화에서 구체적 형상이 포착되면 다음에 다른 작품에서 모방하고, 다시 다른 곳에서 등장하기를 반복합니다. 그러다 결국 우리 모두에게는 '미래에 OOO라는 것이 만들어진다면 저런 모습이겠구나.'라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제품으로 상용화될 때에는 그러한 인식을 따르게 됩니다.
물론 그러한 과정에는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의 조언과 기술적 자문이 지속적으로 반영되기 때문에 모든 공을 영화에게 돌리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실제 소설을 집필하거나 영화를 제작할 때 과학자나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는 일은 매우 흔합니다.)
아이고. 이야기 전개가 너무 길어져서 한글과 헤리티지 전승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는 다음 편으로 넘겨서 하겠습니다. (거짓말쟁이가 되었.........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