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는 꼰대 #1
(대화에서 유전자를 마치 깊은 자기 성찰 introspection이 가능한 존재처럼 묘사한 의인화가 등장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유전자 하나하나가 지적 생명체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먼저 밝혀둡니다. 물론 실제로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인류라는 종 전체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도록 우리가 가진 유전자가 설계되어 있다는 관점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집단 선택설 Theory of group selection, 개체 선택설 Theory of individual selection, 그리고 유전자 선택설 Theory of gene selection들의 견해가 조금씩 혼재되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저는 그중에서 유전자 선택설이 가장 설득력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글에서 일관성을 보이지 않는다면 전적으로 제 실수입니다. ^^)
ㅇ나 실장: 경력 20년 차 에디터. 질문을 하거나 받는 것 모두 좋아하는 그냥 꼰대
ㅇ이 대리: 기간제 계약직 3년을 마치고 정직원으로 채용된 열정남
ㅇ상황: 연휴 끝난 화요일 아침. 이 대리가 혼자 커피 마시기 심심해하는 실장에게 붙들려 나 실장 방에서 강제로 핸드드립 커피 마시고 있음.
[이 대리] 실장님은 주말 잘 보내셨습니까?
[나 실장] 뭐 늘 똑같았지요. 산책하고, 책 읽고, 영화 보고, 음악 듣고, 이것저것 공상하고. 이 대리는 뭐 했나요?
[이 대리] 저는 친구 만났습니다. 소개해 주셨던 카페에 갔었는데 좋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냥 방에 있었습니다.
[나 실장] 이 대리 전에 글 쓰는 거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이 대리] 아,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일기 씁니다. 이것저것 생각나는 걸 메모한다는 느낌으로 말이죠.
[나 실장] 훌륭하네요. 그런데 일기는 왜 쓰나요? 다른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이나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건가요?
[이 대리] 어........ 이.유.가. 있.어.야. 합.니.까?
[나 실장] 이유가 아니라, 뭐랄까. 내가 가진 정보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은 인간이 가진 본능 중 하나라고 하더라구.
[이 대리] 아, 실장님 브런치 시작하셨다고 해서 들어가 봤습니다. 제가 요즘 다이어트를 시작해서인지 ‘음식과 말 섞기’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나 실장] 어렵지 않아요. 이 대리도 한 번 시도해 봐요.
[이 대리] 음,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 실장] 뭐 강요하는 건 아니에요.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나 생각이 있고, 그걸 전달하는 가장 기본적인 수단 중 하나가 글로 써서 남기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걸 ‘호모 아키비스트 Homo Archivist’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사람이 일정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개인적인 기록도 결국은 일정 부분 공공성을 가진다는 관점이 있더라구.
[이 대리] 그게 인간이 가지는 본능이라는 건 잘 이해가 안 됩니다.
[나 실장] 거 제목이 뭐더라? 아! ‘루시 Lucy’라는 영화 봤나요? 우리나라 최민식 배우 나오는 거.
[이 대리] 아, 봤습니다.
[나 실장] 그 영화 보면 주인공 루시가 약물 때문에 뇌 활용능력이 계속 증폭되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자기가 죽을 거 같은데, 이거 어떻게 하면 되냐고 나랑 닮은 그 배우 누구더라?
[이 대리] 모건 프리먼 Morgan Freeman이요?
[나 실장] 맞다. 모건 프리먼. 그 박사에게 방법이 없냐고 물어보니까 그 박사가 그러잖아. “나에게 물어본다면 Pass it on, 지식을 전달해라.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모든 생물이 지금까지 그래 왔다. 모든 생물이 가진 근본 목적이 그렇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DNA에 축적된 정보를 다음 세대에게 넘기는 것이 생물의 기본적인 욕구다.”라고 말이야. 그래서 루시가 박사에게 와 가지고, 자기가 가진 모든 정보를 USB로 만들어서 넘겨주잖아.
[이 대리] 기억납니다. 그런 줄거리였던 것 같습니다.
[나 실장] 자네도 본래 생물이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그런 욕구가 있을 거예요. 뭔가 내가 내 가진 지식이나 정보를 다른 사람이나 다음 세대에게 넘기고 싶다. 그게 왜 중요하냐면, 인간은 자신이 유한한 존재이고 언젠가 소멸한다는 걸 누구나 다 알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가지고 있는, 남들은 모르는 나만 아는 정보가 있다고 하면 그것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나 다음 세대에게 전달해 주는 것이 우리 종, 우리 가족, 우리 사회에게 이득이 된다는 걸 된다는 걸 호모 사피엔스 때부터 인류가 진화해 가면서 그걸 경험한 거예요. 아마 세포 때부터였지? 정보가 누적되고 축적되고 그리고 진화를 거듭할수록 종족이 살아남을 가능성과 경쟁력이 훨씬 더 높아지는 거니까요.
[이 대리] 맞는 거 같습니다.
[나 실장] 그런 의미에서 자네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요? 그런 거 있잖아요. 책들을 보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엄마가 딸에게 남기는 이야기, 예를 들어 '망설이기엔 인생은 짧다', 뭐 그런 책 제목도 있고. 나중에 자네가 자식을 얻게 되면 자식에게 뭔가 해주고 싶은 말들이 있지 않나요?
[이 대리] 있을 거 같습니다. 너무 뒤죽박죽 많을 거 같은데.......
[나 실장] 엄청 많겠지요. ^^
[이 대리] 네, 엄청. ㅜㅜ
[나 실장] 애기들이 태어나서 아장아장 걷게 되면, 아니다, 집 안을 여기저기 기어 다니게 되면 이것저것 주워 먹고 그러거든. 그러면 '에이, 지지! 먹지 마' 그러잖아. 그런 것도 아기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 아닐까요?
[이 대리] 오, 그런 거라면 마음에 듭니다.
[나 실장] 어떻게 보면 그런 걸 고민해 보는 것도 인생에 있어서 우리에게 부여된 근본적인 목표나 이유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드네.
[이 대리] 고민해 보겠습니다.
[나 실장] 그 영화 제목이 뭐더라? 그런 영화가 있었어요. 어떤 두 남녀가 사랑을 하게 되는, 남자가 큰 성공을 거두지만 시한부 인생이야. 자기가 머지않아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여러 가지 단계를 거친다고 하지요. 처음에는 부정하고 그다음엔 분노하고, 나중엔 받아들이고. 그런데 여자가 임신을 했어요. 태아 검사해보니까 애가 아들이라는 거야. 그래서 이 사람이 자기 아들한테 해 주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을 거 아니에요? 아기가 커서까지 하고 싶은 말들을 비디오테이프로 다 녹화해서 남겼어요. 예를 들면 남자 애니까 면도하는 법, “남자들은 면도를 이렇게 하는 거야. 면도날을 절대 옆으로 밀지 마라. 큰일 나니 아래로 해라.”라고. 그리고 동화책도 읽어주고. 자네도 그런 게 있지 않을까요?
[이 대리] 그런데 저는 방금 생각해봤는데,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기는 한데 그걸 잘 말하는 편은 아닌 것 같습니다. 뭐를 해야 하는지, 그 말이나 조언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될 거 같아서요. 아까 말씀하신 면도 같은 경우도 만약에 옆으로 하지 마라고 했는데, 그 친구한테 그게 맞지 않을 수도 있는 거고요.
[나 실장] 어........ 날 면도기는 전기면도기랑 달라. 옆으로 밀면 진짜 큰일 나. ㅜㅜ
[이 대리] 여러 가지에서 내가 개입하지 않았으면 잘 됐을 수도 있는 것을 괜히 내가 개입해서 뭔가 방향이 틀어지고, 이게 안 좋은 방향으로 가면........
[나 실장] 음. 그러면 확실한 정보를 주는 거지요. 아까 말했던 것처럼 이렇게 해라가 아니고, 확실한 정보만을. 예를 들어, “내 계좌 비밀번호는 뭐다”, “스위스 은행 어디 가면 내 이름으로 계좌가 있다.” 라든지. 그런 정보를 말하는 거죠. ^^
[이 대리] 그런 건 몰라도, 다른 생활의 팁이라든가 어떤 조언이나 이런 거는 좀 안 할 것 같습니다. 그냥 간섭하기 싫어서.
[나 실장] 그럼 결국 남기고 싶은 것은 생활의 팁이 아니고 뭔가 소중한 기억이나 전통 같은 것이 되겠지요.
[이 대리] 그런 건 있을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나 실장] 예를 들면, "우리 집안은 대대로 뼈대 깊은 유교 가문으로, 충열공파 24대 손이며"..... 뭐 그런 거?
[이 대리] 하하하. 그런 건 저는 일기로 이렇게 그냥 남기는 거 같습니다. 어느 날 제가 여태까지 살면서 써왔던 핸드폰에 그냥 쭉 정리하는 그런 것도 있고
[나 실장] 이 대리도 일기를 브런치에다가 써보세요. 클라우드 기술이 발달했다고 해도 휴대전화 메모장에 일기 쓰다가 고장 나면 난처하잖아. 어딘가 믿을 수 있는 플랫폼에 백업해 둔다는 생각으로 말이야.
[이 대리] 어........ 그건 좀 무섭던데요. 일기는 제 개인적인 건데 불특정 다수에게 글이 공개될 수 있는 거니까요.
[나 실장] 공개하지 않고 그냥 쓰기도 가능해. 그중에서 공개할 글만 ‘발행’하면 되거든. 브런치를 한번 써보세요.
[이 대리] 한번 해보겠습니다. 블루투스 타자기도 있는 김에.
앞선 “최초의 전쟁화 1부”에서 호모 그라피쿠스 Homo Graphicus라는 말을 했었지요. 이번 글에서는 호모 아키비스트 Homo Archivist라는 말이 있어서 인용해봤습니다.
지금은 더 이상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행위가 단순하게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이나 기술만은 아닙니다. 특히 선조들이 그런 행위를 반복해서 아주 숙련된 경지에 도달하게 되고, 그러다가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나오면서 ‘예술 Art’이라고 부르며 다른 수단이나 기록과 차별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작은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유한한 존재라는 인식이었습니다. 만일 인간이 영원히 사는 존재였다면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써서 기록하는 수준이 더디게 발전했을지도 모릅니다.
놀랍게도 인간이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을 연구하는 생명공학 분야(데이비드 싱클레어 David A. Sinclair 교수는 그 분야를 ‘노화 정보 이론 Information Theory of Aging'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가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분야 전문가들은 노화를 질병으로 보고 있으며, 치료 수단을 찾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최근에는 많은 관련 연구들이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어냈고, 속단 일지 모르겠지만 한 연구자(심지어 우리나라 최고 권위자 중 한 분)가 밝힌 견해에 따르면 20년 이내에 인류는 더 이상 늙지 않는 약물을 접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더군요.
물론 늙어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불멸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만일 노화와 그에 따른 고통이 덜하거나 거의 없는 존재가 된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무언가를 쓰거나 그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까요? 심지어 노화로 인한 기억력 감소도 해결할 수 있다네요. 그러면 음성과 영상으로 기록할 수 있는 수단(고성능에 예쁘기까지 한 휴대전화 말이죠.)이 늘 우리 손에 있는데, 수고스럽게 뭔가를 끄적일 필요를 지금처럼 느끼지는 않을 듯합니다. 호모 그라피쿠스와 호모 아키비스트는 생존경쟁에서 밀려 서서히 사라질지 모르겠습니다.
생각만 해도 슬프네요.
참고자료
리처드 도킨스, 홍영남 이상임 옮김, 이기적 유전자, 서울, 을유문화사, 2010.
안정희, 기록이 상처를 위로한다, 서울, 이야기나무, 2015.
데이비드 A. 싱클레어 매슈 D. 러플랜트, 이한음 옮김, 노화의 종말, 서울, 부키,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