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동수 Jul 22. 2024

데미안 #4

예수 옆에 매달린 도둑

누가복음에는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받을 때 그의 옆에서 똑같이 처형된 두 명의 도둑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그중 하나는 죽기 직전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에게 귀의했지만, 다른 하나는 그러지 않았다.


종교 수업을 듣던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두 도둑에 관해 이야기한다.


"성경 속 두 도둑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저 감상적인 선교 전단용 이야기일 뿐이야. 신은 이미 범죄자들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거든. 이건 달착지근하고, 부정직하며, 지극히 교화적인 배경에 측은지심의 엿기름을 곁들인 것에 불과해. 만약 두 도둑 중 하나를 친구로 삼는다면 누구를 더 신뢰할 수 있을 것 같아? 죽기 직전의 순간에도 개종 따위 우습게 알았던 도둑이 더 멋지지 않아? 당당한 개성을 가진 인물이 성경에서는 자주 손해를 보곤 하지. 끝까지 자신의 길을 간 그는 어쩌면 카인의 후예일 거야."라고.


성경 속 예수와 함께 처형된 도둑들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중 회개하고, 예수에게 귀의한 도둑의 경우, 훗날 니고데모에 의해 '디스마스'라는 이름을 얻고, 엑소테릭(exoteric) 대중 종교에서 '성 디스마스'라 불리며 성인 취급까지 받게 되었다. 과연 그 도둑의 회개와 귀의는 무조건 옳은 것이었다 볼 수 있을까?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아버지의 세계에는 선과 악을 비롯한 모든 것이 동등하게 공존한다. 과연 우리는 빛을 선호한다는 이유만으로 어둠을 저주해도 괜찮은 걸까? 어둠 없이는 결코 빛이 존재할 수 없다. 위대한 정신분석학자이자 프리메이슨이었던 칼 융(Carl Jung)은 '머릿속으로 빛의 형상을 상상한다고 해서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 우리의 의식을 드리워야만이 깨달을 수 있다'라고 했다. 따라서 성경 속 두 도둑에 대한 이야기를 듣더라도 우리가 회개하지 않은 도둑을 저주할 필요가 없으며,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소설 '데미안'의 핵심 주제이자 모든 에소테릭(esoteric) 비의(秘儀)의 궁극적인 목표는 결국 '자기실현'으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자기실현'은 무엇인가. 이는 우리 인간이 신과 같은 '창조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며, 현재의 나의 체험이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아는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일, 사건, 조건, 상황 등은 모두 우리의 의식에서 창조된다. 삶에서 우리가 원치 않는 현실이 나타날 때에 조차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어 인생의 의미란 결국 '창조 체험'에 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이가 깨달아야 할 고귀한 본질이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성의 진리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자는 자신의 삶을 펼쳐내고 있는 스스로에게 늘 당당할 수 있지만, 현재 펼쳐지고 있는 일, 사건, 조건, 상황이 자신이 어쩌지 못하는 다른 어떤 힘의 탓 때문이라는 관념에 빠져있는 인간은 현재 자신의 '창조 체험' 능력을 무력화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 모두의 삶은 결국 우주 전체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진술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진술하는 행위는 각자가 '신의 대리자'로서 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오해하는 것과 달리 신의 세계에는 '해야 한다'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없으며, 오로지 영적 진화라는 목적을 위해 집단으로, 또 개인으로 우리의 체험을 창조하고 있을 뿐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 한 명 분의 삶을 사는 동안 자신을 완전히 실현하고, 본인이 추구하는 모든 것의 화신(化身)이 되는 것이야말로 우리 영혼의 목표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자, 다시 예수 옆에 매달린 도둑 이야기로 돌아가 생각해 보자. 두 명의 도둑 중 진정으로 자신을 이루어낸 것은 누구인가? 회개하지 않은 도둑은 끝까지 자기가 창조해 낸 삶을 선택한 인생을 살았다. 그는 도둑다운 도둑으로 자기를 실현해 냈으며, 자신이 추구하는 것의 화신(化身)이 된 셈이다.


나는 전편에서 '카인'이라는 이름의 의미가 '얻다, 획득하다'라고 설명했다. 죽음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이제껏 자신이 살아온 삶을 부정한다는 것은 '아벨(공허)'과도 같은 것이었으리라. 그 도둑은 결국 '아벨(공허)'을 죽이고, 우주 전체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진술해 내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그는 '카인(얻다, 획득하다)'의 후예로 남았다.



이동수






중요한 건 이 온전한 유일신, 구약과 신약의 신이 탁월한 분이기는 하지만 원래 그가 표상하는 신이 아니라는 점이야. 그는 선, 고귀함, 아버지다움, 아름답고 드높은 것, 감상적인 것이지. 맞아! 하지만 세계는 다른 것으로도 이루어져 있어. 그런데 다른 건 죄다 그냥 악마한테로 미뤄지는 거야. 세계의 다른 부분이 통째로, 절반이 숨겨지고 묵살되는 거야. 우리는 모든 것을 존경하고, 성스럽게 간직해야 한다고 생각해. 인위적으로 분리시킨 절반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를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는 신을 위한 예배와 더불어 악마를 위한 예배도 가져야 해. 그게 올바른 일인 것 같아.

- 데미안 '예수 옆에 매달린 도둑' 中




이전 04화 데미안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