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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ff Jun 29. 2020

세비야의 어느 허름한 카페

커피 한 잔 할까요?

코로나가 전 세계로 조금씩 퍼져가던 몇 달 전 어느 날, 나는 세비야에 있었다.

당시만 해도 크게 우려하지는 않는 분위기였는데 갑자기 상황이 바뀌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당시에 업무차 스페인에 가서 일을 하며 잠시 세비야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냥 쉬느니 다양한 세비야의 카페를 둘러보고 싶어서 머무는 내내 매일매일 새로운 카페를 찾아가 보곤 했다.


아쉽게도 세비야의 카페는 특별한 게 없었다.

그냥 한국 어느 동네 가서도 볼 수 있는 수준?

그리고 벌써 시간이 지나서 1주일 정도가 지나갔고 어느덧 마지막 날이 되었다.

오늘은 좀 더 구석구석 돌아다닐 요량으로 골목에 들어가 보니 구글 리뷰 등에는 잘 나오지 않던 가게가 보였는데 일단 무작정 들어가기로 했다.



흐흠. 바리스타라고는 할아버지 한 분이 계신다.
뭐, 역시 기대감은 없었다.
작은 로스터기 하나와 허름한 소형 그라인더 두 개, 그리고 오래된 1구 머신이 보인다.

생두도 쓰윽 스캔해보니까 내가 찾는 수준의 커피들도 아니었는데 들어왔으니 빨리 먹고 가자는 정도로 정리하고 빠르게 주문을 하기로 했다.

게다가 에스프레소로 커피를 추출해주시는 모습이 요즘 커피 트렌드와 많이 달랐고, 사실 이게 자격증 시험이면 실격 처리할 장면들이 계속 이어진다.
어쨌거나 내 커피가 나왔길래 약 2천 원을 내고 빨리 호로록호로록!

'아... 맛있다.'
'뭐지?'
'왜 저런 기계에서, 저런 원두에서, 저런 자세에서 이 맛이 나오지?'

음. 일단 오늘은 잠시 후퇴해야겠다.
그간 내가 스페셜티를 못 마셔서 입맛이 잠시 변한 것일 거야.
마치 뮤지컬 레 미제라블의 '자베르 경감'의 머릿속처럼 심경이 복잡하다.


'도대체 왜 이런 거지?'



다음날이 밝자마자 다시 찾아왔다.


오늘은 에티오피아 에스프레소를 주문하고 유일하게 이 가게에 하나만 남아 있다는 게이샤 커피도 한잔 주문했다. 역시 에스프레소로 내려주신다.

'이런. 오늘도 맛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내가 믿고 살아온 커피 이론들이 모두 깨져버리는데...'

영어가 통하지 않아서 더듬더듬 물어봤다.
천천히 말씀해주시는 통에 간단한 대화가 가능했는데 이곳에서 오랫동안 로스팅을 하셨고 카페는 아니고 원두 위주로 파는 곳이지만 커피도 손님들이 달라고 하면 시음 삼아 판매는 하신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맛있는 커피는 정성을 담아 내려줄 때 나오는 거란다.
그거 하나면 된다고 하신다.

나는 한국에서 온 바리스타인데 내일 에티오피아로 가기 전에 들렀다가 또 오게 되었다고 했더니 마치 다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신다. (바리스타 티가 났나 보다.)

대단한 기계가, 대단한 커피가 없어도 이런 큰 울림을 줄 수 있는 가게가 부럽다.
많은 생각이 교차하고 내가 믿던 길이 맞는지 조차 혼란스러웠다.



나는 한국을 떠나 스페인 출장에 오기 직전에 한국 커피 1세대라 불리는 송주빈 선생님을 뵌 적이 있다.
당시 처음 뵙는 날이고 커피 인임을 밝히고 싶지 않아서 그냥 앉아서 조용히 커피만 마시고 가려는데, 갑자기 커피 이야기를 꺼내시더니 소주를 한 잔 하자고 하신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또한 난 아직 그런 훌륭한 분들의 조언을 받을 준비가 안되어있다고 생각해서 정중히 다음 기회에 찾아오겠노라고 말씀드리고 황급히 자리를 떴었다.

나는 스페셜티를 떠나서, 아니, 바리스타 챔피언이 아니더라도 전 세계에 있는 이런 멋진 '장인'분들과의 대화가 좋다. 특별히 무슨 조언을 해주지 않아도, 커피를 내리는 내 자세를 고쳐주시지 않아도, 내가 내린 커피맛을 평가해주시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같이 함께 커피 한 잔 하는 것 많으로도 얻어가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아무리 시대가 변해서 '커피는 과학'이라 외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바로 '경험'

수많은 상황 속에서 얻어진 경험은 인류의 과학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다.

커피는 기계가 아니라 한 알 한 알 모두 다른 생명체이기 때문일 게다.



사실 위에 언급한 송주빈 선생님이 운영하시던 이전의 매장은 아주 오래전 내가 커피인이 되고자 할 때 회사를 다니면서 몰래몰래(?) 찾아가서 한 잔씩 마셨던 가게다.
이제 비록 그 당시의 가게는 없어졌지만 다른 곳에서 이렇게 계속 커피를 내려주심에 감사드린다.

나도 이런 분들처럼 오래오래 커피를 할 수 있을까?

갑자기 그 매장을 마지막으로 찾아갔던 때가 떠오른다.

그날은 여자 친구와 헤어지기로 하고 마지막 만남을 위해 갔던 여의도 2층의 카페였는데, 그날 만나서 내가 함께 그녀를 만나며 모았던 그 카페의 무료쿠폰을 주고 왔다.
어차피 난 다시 오지 않을 거니까 너는 언제든 와서 마시면 좋겠다고 했다.

뭐 나도 어렸지만, 그 친구는 훨씬 더 어렸기 때문에 지금은 유치해 보여도 그때는 썩 내 모습이 괜찮아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ㅎㅎ

뜬금없이 세비야의 장인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송주빈 선생님을 지나서 나의 옛 추억팔이로 끝나버렸지만,

결론은 난 아직 멀었다는 것.

 

커피도 그리고 사람 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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