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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ngwoo Kim Feb 02. 2024

시간을 나는 드론 (3)

백제와 마한을 추억하며 (1) - 살기 좋은 곳과 크기 좋은 곳

삼한에서 삼국으로


백제는 다른 두 국가에 비해 빛을 덜 받았다. 신라는 화려하지 않고 시작도 늦었지만 역사의 승리자였다. 고구려는 결국 한반도 역사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지만 중원과의 전쟁으로 빛났다. 그러나 백제는 그들이 대세였던 기간조차 충분히 조명받지 못했다. 게다가 문서자료도 충분하지 못해 (고구려는 중원과 부딪힐 일이 많아 여러 문서에 그 기록이 꽤 있고, 신라는 그들의 통일역사인데다 고려가 신라의 체제를 평화롭게 흡수하여 그 기록이 온전히 이전되었다) 더 많은 고고학 연구가 수반되어야만 한다.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에 배운 삼한과 삼국은, 그 경계가 모호했다. 정확히는, 삼한 시대에 대해 거의 다루지 않았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그냥 적당히, 마한은 백제가 되고 변한은 가야가 되었으며 진한은 신라가 되었다는 느낌적인 느낌이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변한과 진한은 각각을 구성하는 많은 소국들이 경쟁 과정을 거쳤고, 그 결과 6가야(혹은 7가야)와 금성신라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변한과 진한은 그래도 과거의 설명과 약간은 맞아들어가는 느낌이다. 그러나 마한은?


백제는 한성백제다. 모두가 알듯이 고구려에서 넘어왔다. 외지인이다. 토착 세력의 성장만으로 마한의 경쟁구도를 이겨냈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다. 마한은 현재 충남-전북 지역에 걸친, 목지국을 비롯한 수많은 소국들의 연합체다. 한성백제 이전 한강유역 및 한강하류지역에도 소국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백제의 역사도 잘 전해지지 않는 판에 그들의 유무가 과연 전해지겠는가 싶다. 


토지가 비옥하다는 것


먹고 사는 문제가 곧 생존이고, 그것이 곧 문화 생성의 근본이었던 때에, 풍부한 식량은 거류지의 첫번째 조건이었다. 농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에는, (어차피 배를 만들 기술은 더더욱 없었을 테니), 바다와 강과 산에서 채집하기 좋은 곳을 골랐을 것이고, 그 이후에는 비옥한 토지를 찾았을 것이다. 비옥한 토지는 토양의 지질도 중요하지만, 햇빛도 잘 들어야 하고, 온도도 적당해야 하며, 무엇보다 마르지 않는 수분, 즉 큰 강이 지근거리에 있어야 한다. 특히 강의 상류보다는 중하류에 조건을 만족하는 지역이 많다. 


한반도는 산이 참 많다. 대체로 서쪽보다 동쪽에 몰려 있지만, 작고 낮은 산지는 곳곳에 산재한다. 따라서, 지평선을 볼 수 있을 정도의 아주 넓은 평야는 흔하지 않다. 달리 말하면, 하나의 마을을 이룰 법한 크기의 평지가 곳곳에 있고, 그 평지들을 관통하여 크고 작은 물길이 흐르고, 그 평지들 사이사이를 크고 작은 산지들이 감싸안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평지들 하나하나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일종의 마을 울타리 역할을 하는 산들을 경계로, 세력이 생기고 세력의 충돌이 발생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철기 시대 이전, 청동기 문화를 기반으로 한, 삼한 국가들의 모습이 대체로 이랬을 것이고, 알려지지 않고 유물만을 남기고 간, 더 작은 세력들도 다수 있었을 것이다. 정리하면, 배후 지역으로 비옥한 평지가 어느 정도 존재하고, 험준한 산지나 큰 물줄기로 보호되는 지역에서, 기초적인 국가체계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아는, 우리 역사 속 주요 국가들의 시작점 또한 대부분 그런 곳이었다. 고구려의 졸본성, 신라의 사로, 한성백제의 위례 등 초기 국가들부터 조선의 한성에 이르기까지 그렇다. 물론, 그렇지 않은 곳도 있긴 하다. 천도만 했을 뿐인데 국가가 무너질 뻔한 태봉(마진)의 철원과, 지역 호족이 최종 승자가 되는 바람에 불리한 입지조건에도 불구하고 수도가 된 고려의 개경 같은 곳 말이다.  


그렇다면, 한반도의 최대 농업생산력을 가졌던 지역, 지금의 경기 남부지역부터 전북 김제평야, 전남의 나주평야 같은 곳은 어땠을까. 적어도 생산력만 놓고 보면, 훨씬 많은 인구를 먹여살릴 수 있다. 산지가 근처에 없어 군사적으로는 불리했겠지만 더 많은 노동력과 생산력을 바탕으로 평지성을 세워 운용할 수도 있다. 평지성이 산성보다 불리하긴 하지만, 극단적인 예로, 우주방어급 방어력을 자랑했던 고구려의 요동성도 평지성이긴 했다. 하지만, 통일국가로 기능했던 통일신라, 고려, 조선에서 주요 행정중심지로 운용된 적은 있어도, 군사중심지 기능을 포함해야 하는, 국가의 수도로 운용된 적은 없었다. 


풍수의 시작


풍수의 사상적 유래라든지, 풍수의 내용이라든지, 나는 이런 것들을 쓸 깜냥이 되지 못한다. 아는 것도 별로 없다. 국사 교과서에 언급된 풍수의 역할 정도만 겨우 알 뿐이다. 대표적인 것이 조선의 도읍을 정할 때, 그리고 역사 속 묏자리에 대한 야사들 정도. 그 이론의 옳고 그름을 차치하고 본다면, 현실의 권력 또는 재력에 대한 기대를 이루기 위한 도구로써 풍수를 이용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풍수를 검색하면, 동서남북이 여러 종류의 산지로 둘러싸이고, 가운데 동에서 서로 물길이 흘러야 하고, 비옥한 평지가 있긴 하지만 평야라 부를 만한 지형을 품고 있지는 않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뭐 북서풍을 잘 막아주고, 따뜻한 남풍을 잘 가두고, 강의 범람 위험에서 한 걸음 떨어져야 하고, 교통 및 물류의 중심이었던 수운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하고, 동시에 강을 낀 비옥한 토지를 배후 지역으로 두어야 한다는 정도로 정리해볼 수 있겠다. 


굳이 풍수로 설명하지 않아도, 과거 역사 속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던 국가들의 평시 수도는 유사한 조건의 입지를 가졌던 곳으로 보인다. (고려 개경의 나성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경우 평시 기능하는 수도와, 인근 산악지대에 위치한, 전시에 기능하는 방어 기능을 한층 더 강화한 수도가 있었다. 예컨대, 신라(사로국)의 월성-명활산성, 고구려 국내성-환도산성, 한성백제 풍납토성-몽촌토성 등이 있다. 여기서는 행정 기능에 특화된, 평시 수도의 입지만을 이야기한다.) 외침에 대한 방어의 기능은 어차피 전시 수도가 담당할 테니, 이 평시 수도들은 자연재해와 계절변화에 따른 충격을 최소화하고, 국가 중심부에서 결정되는 행정명령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지방에 전달할 수 있어야 하며(여기에는 각종 진상품을 포함한 조세 운송에 관한 부분이 포함된다.), 수도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과밀 인구를 먹여살릴 수 있을만한 배후 생산지역을 갖고 있다. 


강의 상류는 수운에 불리한 것도 있지만, 바다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면 외부 세력과 단절될 위험이 있다. 게다가

강을 낀 비옥한 토지는 하류에서 멀어질수록 줄어든다. 물론 강 하구에 너무 가까워지면 염수가 역행하여 생산력이 급감할 수 있다. (예: 한성백제 극초반, 비류와 온조의 이야기) 이런 면에서 볼 때, 큰 강의 중하류에 위치하고, 완전 평야가 아닌, 전시 수도를 세울 수 있을만한, 최소한 구릉지대라도 인근에 존재하는 곳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다만, 풍수의 시작점이, 신라 말기 즈음으로 추정되고, 풍수가 성행하기 시작한 시기가 후삼국 시대 근방이라는 점을 볼 때, 풍수 이론은 그때까지 흥망성쇠를 거듭한 많은 주변 국가들의 입지를 분석하여 정리하여 문자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소위 현대적 학문으로 기능하려면, 검증이 필요한데, 이것은 다른 요소의 영향을 완벽히 배제했을 때 입지의 긍정적 요인이 해당 세대 혹은 후손에게 결정적인, 아니면 최소한 의미있는 수준의 긍정적인 효과를 미쳤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점에서, 아마도 영원히 불가능한 절차가 아닐까 싶다. 


살기 좋은 곳, 크기 좋은 곳 1 - 입지


단순히 토지가 비옥하다면, 그 땅을 부리기 위한 농부의 인구만큼이 그 지역의 가치가 된다. 수운이 있다면, 다른 지역과 교역을 할 수 있고, 이는 교역을 위한 상인과 운송업의 인구가 그 지역의 가치에 더해진다. 강의 상류 혹은 연안 멀지 않은 곳에 광산이 있다면, 그 채굴업장에 물품을 공급하는 것도, 그 자원을 통해 물건을 가공하여 팔 소비자가 있는 것도, 이 지역이 되고, 그 관련 인구가 그곳에 거하게 되어, 그 가치가 더해진다. 


무엇인가 큰 일을 하려면 한 번에 큰 자금이 필요한데, 이것이 군사가 됐든 정치가 됐든 사업이 됐든, 일종의 '투자'가 있게 되고, 그 수익이 평소의 곱절이 되면, 이른바 자본의 흐름이 발생한다. 그 흐름을 잘 타는 것만으로도 수익이 생기게 되고(일종의 브로커), 그렇게 되면 더 많은 사람을 수용하게 된다. 그러면서 마을이 성채가 되고, 도시가 되고, 사람이 모이면 종교가 생기고, 계가 생기고, 세력이 생기며, 자연스레 정치가 생기고 권력이 생기며 여러 때와 시와 운이 잘 따르면 국가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거 말고, 나 하나, 개인 각각이 잘 살아가기 위한 조건은 어느 단계에서인가 희석되어 사라져 버린 것 같다. 지역이 발전하고 국가가 형성되는 그런 입지는, 굳이 따지면, 내가 단순히 살기 좋은 곳이 아니라, 우뚝 서서 지위를 갖고 누리기 좋은 입지인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에 따라, 내가 살기 좋은 곳의 입지조건은 달라질 것이다. 내가 농부면 비옥하고 양지바른 땅이되 멀지 않은 곳에 시가지가 있거나 최소한 운송이 어렵지 않은 지점이 있어야 하고, 운송업 혹은 상인이라면 각지의 물품을 운송하여 자리를 펴고 거래를 하기 좋은 곳이어야 한다. 채굴업자라면 너무 산골짜기나 깡시골에 위치하지 않는 것을 원할 것이고, 수공업자라면 채굴장과 장터와의 거리가 적당한 곳을 원할 것이다. 


하지만, 국가를 위한 입지는 조금 다르다. 위 여러 종류의 사람들의 입지조건, 즉 비옥한 지역이 인근 혹은 운송망이 닿는 영역 내에 여럿 위치하여 국가의 생산력을 확보하고 적당한 지점에 강과 산이 있어 국가를 보전할 수 있는 지역을 원할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의 조건이 더 붙어야 한다. 바로, 그런 좋은 입지의 이웃 지역이 최대한 멀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 좋은 입지의 지역이 있어도, 근거리에 그만한 입지가 또 있다면, 그건 좋은 시그널이 아니게 된다. 


마한이 위치한 곳과 변한이 위치한 곳이 바로 그런 곳들이었던 것 같다. 큰 강도 잘 흐르고, 수운도 좋고, 따라서 생산력 최강인 평야들이 산재하고, 그 평야들 사이사이로 꽤나 높은 산맥들이 지나가서 천혜의 방벽이 되어주는 곳들이, 북으로는 평양 수계부터 남으로는 영산강 수계까지, 또는 낙동강 상류부터 남강, 섬진강 수계에 이르기까지, 서로 이웃하며 쭉 이어진다. 그 각각의 입지에 삼한의 소국 하나하나가 입지했다고 생각해보자. 그들이 그들의 최초 경계를 넘어서 큰 국가가 되려면, 이웃을 압도할 만큼 더 커져야 하는데, 다 붙어 있으니 다 고만고만한 상태가 되어버린다. 


다른 삼한에 비해 유독 시작과 발전이 빨랐던 한성백제는, 고구려의 이주민으로써 이득을 갖고, 중원 및 낙랑군 등과의 교역을 통해 고만고만한 지역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한성백제가 커다란 백제가 되기 위해선, 비록 다른 고만고만한 마한소국들 하나하나 보다는 커졌지만, 그런 나라가 50개 60개 되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조금 먼 나라들에게 위세품을 보내어 우리 편 만들고, 가까운 나라들을 하나하나 누르고 합치고 하는 것이 시간도 오래 걸리겠지만 국가의 힘을 꽤나 소모하는 일이 된다. 


저 멀리 압록강변에 있던 고구려는 중원과 부딪히기는 했지만 인근에 경쟁할 만한 곳은 꽤 멀리 있던 한사군과 개마고원 너머의 옥저와 동예 소국들 뿐이었다. 신라는 발전이 더뎠지만, 인근에 경쟁할 만한, 체계를 갖춘 국가는 없었고, 따라서 시간을 선물받았다. 변한 가야연맹체는 일찌감치 시작했어도, 마한처럼 서로 경쟁할 수 밖에 없는 입지였고, 하필 옆에 신라가 있었다. 낙동강이라는 자연방벽이 있었기 때문에, 넘어갈 만큼의 여력이 먼저 생긴 곳은 안타깝게도 신라였고, 따라서 마한 소국들이 한성백제에 흡수당하듯이, 변한 소국들은 신라에 흡수당했다. 


살기 좋은 곳, 크기 좋은 곳 2 - 인간관계


거리가 가까워야 좋을까, 멀어야 좋을까. 대부분의 경우, '거리'는 비용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가까운게 좋다. 그러나, 한 명 한 명이 살기 위해선, 한 명 한 명에게 독립적으로 부여되는 일정 규모 이상의 공간이 필요하고, 이는 최소한의 거리가 확보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앞에서 말한 '비용'은, 관계가 형성된 후의 일이다. 거의 대부분의 인간은 최소 하나 이상의 공동체에 속하여 가치를 창출하는 역할을 맡게 되는데, 서로 발생시킨 가치가 교환되는 과정에서 이 '거리'가 비용으로 인식된다. 


가치창출이 관계를 기반으로 할 경우, 이 '거리'는 수익에 반비례한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이렇게 창출된 가치는 개개인에게 분배되는 과정을 수반하고, 이는 가치의 교환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거리'는 수익과 반비례하고 동시에 비례하기 때문에, 성공적인 관계라면 그 사이 적절한 무게중심을 찾아가게 된다. 


개인과 개인간의 거리, 공동체에 소속된 사람과 사람과의 거리 모두, 그 '적당한' 무게중심의 공간에서 벗어나려 하는 경우, 다시 말해 창출할 수 있는 최적의 수익을 넘어서려 하거나 최소의 비용을 더 줄이려고 한다면, 결국 깨어지는 관계 혹은 깨어지는 공동체로 이어지게 된다. 작든 크든 간에 많은 다툼은 결국 각자의 성장을 위한 자원을 상대를 이기기 위한 용도로 전용하게 만들고, 누가 이기든 간에 결국 그 둘 모두에게 위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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