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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ngwoo Kim Jan 31. 2024

한겨울의 역사를 탐방하기

수묵화로 보이는 세상

겨울에는 사람이 적다


사계절 중에 겨울을 제일 좋아하기는 해도, 그것이 한겨울에 역사를 탐방하기 시작한 이유는 아니다. 그냥, 지금 나의 시간이 났을 뿐이고, 더위와 습기에 취약한 나의 체질 덕에 비교적 건조하고 시원한(?) 겨울의 긍정적인 면모로 나의 눈과 귀를 열심히 가리는 중이다. 


내가 오래 살았던 남캘리포니아의 겨울은 일년 중 유일하게 비가 오는 계절이었다. 온도는 0도에서 영상 10도 사이였고, 그 온도에도 사람들은 재난같은 추위라며 알래스카에서나 쓸 법한 털코트를 꺼내 입었다. 겨울옷 자체가 없는 사람들도 많았기에, 영상 2-3도의 날씨에 동사했다는 뉴스도 나오곤 했다. 그 반대로, 눈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고, 동네 뒷산이 백두산 높이였기 때문에, 아랫동네에 비가 오면 윗동네는 폭설이었고, 폭설만 났다 하면 스키장이고 캠핑장이고 북적북적하는, 혼란스러움이 극치를 달리던 곳이었다. 


한국은, 다행히 내가 즐기는 곳이 현대의 화려함보다 과거의 차분함을 느끼는 곳이 많아서인지, 사람이 적었다. 겨울이라서 사람이 적었던 것은, 유적지와 산책로가 결합된 곳이거나, 혹은 수목원과 휴양림이 결합된 곳들의 경우에만 해당될 것 같다. 


사색의 공간


방문객이 적은 시간은, 상대적으로 나에게 더 많은 공간을 허용한다. 함께, 방문객이 적은 공간은, 나에게 더 많은 사색의 시간을 허락한다. 하지만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청청한 숲과 이름모를 들꽃으로 넘실거려야 할 들판은 나에게 사색의 공간으로 빌려줬다는 핑계와 함께 앙상한 나뭇가지 몇 개와 봄을 기다리는 준비 팻말만 가득하다.   


23년 12월 초, 봉화 백두대간수목원. 들꽃과 나무로 가득해야 할 곳이 삭막하기만 하다.
23년 10월 중순, 순천만 정원박람회 중 갈대습지. 온 공간이 온갖 생명으로 가득하다.

그에 반해, 자연의 제철을 방문하면, 나에게만 온전히 주어지는 공간과 시간은 적다. 하지만 그 공간은 그들의 것이 된다. 나의 사색의 범위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자연이 품는 각종 생명이 뿜어내는 그들의 호흡과 열기로 가득찬다. 정적인 시공에서 이루어지는 사색과, 동적인 시공에서 이루는 사색의 차이다. 나는 분명 정적인 사색을 선호하지만, 동적인 공간이 나에게 공급하는 에너지 또한 귀함을 느낀다. 


겨울은 정비의 시간


그러나, 겨울이 평소보다 한산하다는 점 때문에, 각지의 문화재 관리기관은, 겨울을 시설 정비의 기간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겨울에는 개장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주변 산책로와 접근로를 정비하느라 땅을 파헤치는 등 통행이 불편해지는 경우가 잦다. 또는 겨울을 틈타 미뤄두었던 리모델링을 실시하는 경우가 있다. 가장 아쉬운 점이다. 박물관 영업을 아예 중단하고 공사를 하는 경우는 포털에 공지가 되지만, 부분 리모델링을 하는 경우는 그런 안내고지를 받기 어려워 헛걸음을 하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24년 1월 말. 무주 적상산 사고 올라가는 길 통제안내. 포털에는 관련 정보를 찾기 힘들었다.


공사가 아니더라도, 겨울의 특성상 통행이 힘든 경우가 있다. 비가 자주 와도, 햇빛이 충분하고 낮 기온이 충분히 높으면, 비록 흙길이더라도, 금방 마르고 단단해진다. 그러나 겨울은 땅이 밤에 얼어버리고, 낮이 되면 그 땅이 풀리면서 진흙뻘이 되는 경우가 있다. 옛날 옛적과 달리 지금은 많은 국립공원, 유적지 및 문화재 탐방로를 잘 정돈해놔서, 걷기 좋은 방식의 포장을 해놓은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여전히 흙길인 곳도 있다. 


24년 1월 초, 문경 오픈세트장. 문경도립공원 탐방로 거의 대부분이 저런 흙길이고, 방문 당시 전역이 질퍽질퍽했다.


모든 것이 도화지 위 그림이 되다


그냥 추울 때 말고, 폭설이 내릴 때 혹은 눈이 가득 쌓여 있을 때, 고즈넉해진 유적지를 방문하면 시야에 보이는 모든 순간이 미술품이 된다. 물론, 각 계절마다, 각 날씨마다 자연을 바탕으로 하는 공간은 항상 새롭다. 그러나, 설국이 된 세상 속에서 보이는 공간은 그 선과 면이 더욱 강조된다. 다만, 이것은 색상에 대한 영역은 줄어들고, 약간 수묵화에 가까운 느낌이 된다. 


24년 1월의 고창읍성. 나무와 단청의 화려함이 극도로 절제되어 보인다.
23년 10월 중순, 순천만 정원박람회. 온갖 들꽃과 나무가 형형색색의 화려함을 뽐낸다.

역사 유적지는, 아예 관리가 되지 않는 노지가 아닌 이상, 그 구조와 관람순서에 따라 여러 막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연극의 플롯이다. 예쁜 들꽃과 단풍은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에 취해 역사의 공간과 공간이 주는 스토리라인을 놓치게 하기 십상이다. 사색의 공간과 시간을 더 많이 허락한다는 장점에 더해, 해당 유적지 곳곳이 다양하게 갖는 각자의 스토리를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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