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eping my savor: it's just YOUR recipe!
먹방, 쿡방이 대세다. 주방 한 켠에서 쪼그려 끼니를 때우고, 주 5일 근무, 법정근로시간 따위는 안드로메다로 보낸 채 하루의 반을 중노동에 시달리던 주방 근무자 대신에, 화려하기만 한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셰프 복장을 한 이들만 잔뜩 있다.
방송 한쪽에서는 다이어트를 외치고, 건강식품 또는 식단의 중요성을 외친다. 다른 곳에서는 운동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일일 적정 식사량과는 거리가 먼, 엄청난 양의 음식을 해치우는 먹방에 사람들은 열광한다. 매일 먹기는 부담스러운, 짜고 맵고 달고 신, 한 숟갈 반찬이면 밥 한 그릇은 뚝딱할 것 같은 음식에, 레시피에 사람들은 또 열광한다. 온라인에는 그런 음식들의 레시피가 방송 직후부터 넘쳐난다.
패션이나 음악에는 유행이 있다. 사람이 사는 집에도 유행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유행'에 맞춰 옷을 입고, 음악을 즐기고, 그런 류의 집에 살려고 한다. 특히 집단주의 성향이 강한 사회의 경우, 소외되지 않기 위해 개개의 기호보다 유행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경향이 짙다. '다름'보다 '같음' 혹은 '비슷함'에서 일종의 쾌락을 느끼는 것이다. 반대로,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사회의 경우, 여러 가지 유행이 동시에 혼재되어 있는 경우도 많고, 그렇지 않더라도 하나의 유행 안에서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는 경우가 잦다. 이는 남들과 무언가 '다름'에서 개개인의 존재 가치를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작은 공동체라도 문화적 다양성이 존재한다. 하물며, 하나의 사회라면, 구성원 각각이 서로 다른 취향과 문화적 기반을 가짐은 자명한 이치이다. 유행은 이들 간의 공통분모를 기반으로 시작된다. 한 번 시작된 '변화'가 '유행'이 되어 사회에 안착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더욱 많은 이들에게 전파되어야 한다. 과거 도시와 시골 간의 유행 차이가 작지 않았던 것은 당시 정보의 전달 수단이 변변치 않았기 때문이다.
TV,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미디어는 일종의 정보 전달 수단이다. 편지, 전화 등으로 대표되는 과거의 정보 전달 수단과 차이점이 있다면, 일대일이 아니라 일대 불특정 다수에게 전달한다는 점이며, 쌍방향 통신이 거의 동 시간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크게 줄인 것이며, 이는 상기한 유행의 성공률을 크게 높이는 요인이 된다.
미디어 산업의 특성상, 유행에 뒤처지는 순간 도태되기 십상이다. 그렇기에, 유행이 시작되는 순간 거의 대부분의 미디어가 그 흐름에 뛰어들게 된다. 생산된 미디어 컨텐츠는 컨텐츠 소비를 통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고, 컨텐츠를 접해본 자와 접해보지 못한 자 간에 발생하는 대화의 간극은 유행이 본격화될수록 극심해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현상은 평소 유행에 민감하지 않은 이들까지 해당 흐름에 합류하는 효과를 낳음으로써 유행의 대중화를 이끌게 된다.
'유행의 대중화', 경제학적으로는 참 매력적이다. 시장 진입 시 일정 수준 이상의 수입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충분히 낮은 리스크와 일정 규모 이상의 일상적인 수요가 존재해야 한다. 미디어를 통한 특정 유행의 빠른 대중화는 예측 실패에 대한 리스크를 낮춰주며, 동시에 미래 일정 기간 동안의 충분한 수요를 확신할 수 있기 때문에, 규모의 경제를 통한 수입의 극대화 또한 노려볼 수 있다.
문화적으로는 어떨까. 하나의 유행이 큰 물결을 이루기 전에는, 이런 흐름이 될 만한 매력적인 여러 분야에 사람들의 관심이 나누어져 있었을 것이다. 인적, 물적 자본 역시 이런 특성에 맞게 다양하게 분산된다. 그러나, 하나의 큰 유행이 사회 전체를 휩쓸게 되면, 수요뿐 아니라 자원의 공급도 그 흐름에 집중된다.
요즘 '미식'이라는 말이 뜨고 있다. 단지 살기 위해, 혹은 일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챙겨 먹는 '끼니'가 아니라, 음식의 '맛'에 보다 집중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맛'이야말로 수많은 사람들의, 그 무엇보다 주관적인 성향이 드러날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다. 한 사람의 입맛이 결정되는 것은 빠르면 만 7세, 늦으면 11세까지의 맛에 대한 기억들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한다. 음식 선택의 주관이 없는 시절에 형성된 맛의 기억이 한 사람의 입맛을 평생 좌우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주부'는 엄연히 '가정'이라는 공동체의 식문화 공급자이다. (필자 주: 여기서 '주부'는 가족 공동체 내 성별을 특정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역할만을 지칭하는 것임) 동시에 수요자이기도 하지만, 한 명의 주부가 다른 모든 가족 구성원들의 식문화에 대한 수요를 반영한 뒤, 최종적으로 예산과 여타 특수한 환경을 반영하여 해당 가정에 음식을 제공하기 때문에, 수요자로서의 성격보다는 공급자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대가족이 하나의 가정을 이루어 살던 때, 많은 경우 '주부'의 역할은 여성에 국한되었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았을 뿐 아니라, 가정 내에서조차 여성들의 위치는 높지 않았다. 이들 여성 '주부'의 식사 공급은 일차적으로 풍족한 적 없었던 당시 경제 상황에 기인했을 것이고, 이차적으로는 여성들 자신보다 남성들의 수요에 초점이 더 맞추어져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위로는 할아버지부터 아래로는 아이들까지, 갖은 수요를 적절히 충족시키며 동시에 빠듯한 살림 속에서 욕구불만이 터져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가정 공동체에 뿌리 박힌 위계질서에 기대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화와 동시에 도시화가 진행되었고, 1인당 노동생산성이 크게 향상되면서 가족의 크기는 크게 줄어들었다. 교육으로 인적자본의 수준은 크게 향상되었고, 가족 구성원 간 관계는 위계질서 대신 수평적인 관계로 대체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위계질서에 가려 있던 개개인의 욕구가 시장에 직접적으로 반영되기 시작하였다.
'혼밥족', '1인 가구'의 등장은 '주부'의 개념 자체를 바꾸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대신' 음식을 공급해 주던 전통적인 '주부' 대신, 음식 수요자가 곧 직접적인 공급자가 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식문화 공급자로서의 '전통적인' 주부의 위치는 가구의 크기에 반비례하는데, 가구 단위가 그 최소 단위인 1에 수렴하게 되면서 전통적 주부의 의미는 상당 부분 퇴색되었다. 즉, 1인 가구를 위시한 가정의 소형화가 지속될수록, 식문화 산업 내에서 주부의 성향은 수요자에 가까워지며, 이는 각 개개인의 음식에 대한 욕구가 식문화 산업 시장에 더 가까워진다고 볼 수 있다.
조간신문 TV 편성표에 집중하던 시절이 있었다.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다면, '본방사수' 외에는 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도 '재방송'은 있었지만, 나의 생활패턴과 동떨어진 시간대에 편성되기 일쑤였다.
과거 가족 구성원들의 미디어 소비는 한정적이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각 구성원들의 컨텐츠 소비 성향이 사회 전반적으로 비슷했다고 할 수 있다. 주부의 미디어 컨텐츠 소비는 다른 구성원들이 주거 공간을 떠난 후부터 돌아올 때까지, 즉 오전 9-10시경부터 오후 3-4시까지 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다른 구성원들 때문에 보지 못한 컨텐츠의 재방송분과 위에서 잠깐 언급한, 교양 목적의 요리 프로그램이 주로 이 시간에 편성되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두드러진 핵가족화와 최근 들어 부상한 1인 가구, 또는 혼밥족 등의 흐름은 과거 TV 편성 시간의 공식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음식에 대한 관심이 사실상 모든 이로부터 발생하게 되었기 때문에, 음식 관련 컨텐츠에 대한 수요가 사실상 전 시간대로 확장되었다. 게다가, 음식을 '만들'기 위한 컨텐츠에서, 이제는 어떤 (완성된) 음식을 '소비'할 것인지에 대한 컨텐츠 수요가 크게 늘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응도 필요했다.
다행히, 미디어 산업의 발달은 컨텐츠 공급의 양적인 측면에서의 어려움을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었다. DMB나 케이블 TV 등의 미디어는 컨텐츠 공급 채널을 획기적으로 증가시켰다. 인터넷의 보급은 저비용 방송을 가능하게 하면서 대형 방송사가 미처 커버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충족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내용적인 변화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기존 '교양' 성격의 요리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VJ특공대', '생활의 달인', '생생정보통' 등의, 전문적인 부분을 떠나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담는 프로그램으로는 음식 및 요리에 관한 다양한 컨텐츠를 담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외국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조차 없는 '먹방', 그리고 '쿡방'이 한국 방송가를 뒤덮었다. 음식 관련 컨텐츠를 주로 다루는 Olive TV의 등장에 그치지 않고, 지상파 3사 및 새로운 예능 강자로 떠오른 TvN 등 다수 케이블 예능 컨텐츠가 음식 컨텐츠에 적을 두고 있다. 제이미 올리버, 고든 램지 등 시장성이 높은 셰프들의 쿡방을 따라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예능성이 짙은 퍼포먼스를 재미의 소재로 삼는 등 '교양'보다는 '재미'에 더 집중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많은 경우 '쿡방'의 내용은 '먹방'과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쿡방'은 최소 준 프로 요리사들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일반인들의 참여가 메인 컨텐츠인 "마스터셰프 코리아"나 "한식대첩"의 경우에도 중간중간 프로 셰프들의 비중이 작지 않다.) 따라서 '먹방'에 비해 보다 많은 정보가 오가며, '재미'를 얹었지만 적어도 '재미'가 주인공이 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셰프들은 퍼포먼스에 신경 쓰고, 조리 과정 중에 많은 팁들을 나눈다. 귀한 식재료로 '장난'을 쳤다가는 여론의 뭇매를 맞기 마련이기에 (그럼에도 누군가는 비린내를 잡겠다고 꽁치에 레몬 대신 오렌지를 들이부었다. 그 결과는...?) 쿡방에서 재미의 영역은 셰프들과 진행자 간의 언어유희, 허세, 혹은 요리 잔기술 정도에서 그치게 된다.
초반 '먹방'의 내용은 특정 식당 또는 특정 음식을 조명하는 것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를 위해 음식 역사 혹은 문화에 대해 지식적인 조언을 줄 수 있는, 음식 관련 기자나 관련 학자, 혹은 의사 등이 패널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고, 간혹 그렇지 않더라도 관련 지식이 상당히 풍부하여 보다 깊은 이야기를 해 줄 수 있거나 혹은 최소 맛 표현이 풍부하여 더 많은 이들이 음식에 대한 '생각'에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이들이 섭외되었다. 근래의 '수요 미식회' 만큼은 아니더라도, 과거 단순히 '맛있어요'만 외치던 음식 프로그램에서, 이제는 맛을 표현하거나 식재료의 특징과 조리 과정을 상상하며 이른바 '썰'을 풀기 위한 음식 컨텐츠로 발전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근래에 들어 새롭게 등장한 '먹방'과 '쿡방'은 이전의 그것들과는 약간 다른 양상을 보인다. '먹방'은 음식을 '열심히 또는 맛있게 먹는' 행위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경향이 생겼고, '쿡방'은 여러 가지 요리에 한두 가지 식재료나 레시피를 공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다수 카테고리의 음식에서 비슷한 맛을 추구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새로운 먹방은 음식을 먹는 사람이 말하는 맛에 대한 표현이나 음식에 대한 '썰'보다는 음식을 먹는 행위, 즉 퍼포먼스 그 자체를 화려하게 조명한다. 시청자들은 누구나 '탐식'에 대한 욕구가 있다. 이를 대리 만족하는 것이다. 그리고 방송 시청의 목적은 바로 대리 탐식을 통한 '쾌락'이다. '즐거움'이나 '만족'의 상위 개념이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맛'의 기억과 취향이 다르기에, 비록 같은 테크닉을 쓰더라도 만들어지는 음식의 맛과 향은 제각각이기 마련이다. 음식을 '먹는' 행위와 달리 '만드는' 행위는 어느 정도 지식과 경험, 그리고 기술이 필요하다. 요리를 시작하는 많은 이들은 남들이 올린 많은 레시피를 따라 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맛에 대한 경험은 그들이 시도하는 요리에 가장 큰 자산이 된다. 그러나 '나만의 레시피'를 정립하는 것은 하루 이틀에 될 일이 아니다. 살기 팍팍한 시대에 자신의 업도 아닌 요리에 열정을 퍼부을 사람은 많지 않다. 이사만 왔다 하면 대문이 온통 배달 전단지로 뒤덮이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쿡방의 방식대로라면, 아주 손쉽게 목표한 맛에 도달할 수 있다. 모든 음식에 라면수프를 집어넣거나, 설탕을 퍼넣거나, 매운 소스로 범벅을 하는 등의 조리 행위는 사람들의 제각기 다른 취향에 대한 존중 따위는 없어 보인다. 취향을 벗어나면 마치 이겨내야 할 목표로 둔갑한다. 재료의 밑 작업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는 사치일 뿐이다.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더 큰 통증으로 그 스트레스를 덮는다. 몸이 갑작스레 허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한의학에서 권하는 이열치열, 이한치한은 어느새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단맛, 감칠맛, 그리고 통각(매운맛은 미각세포가 아니라 통각 세포에서 느껴지는 자극이다)의 대 유행이다.
미디어는 태생이 선정적이다. 인쇄물이 사람들의 '생각'을 이끌어낸다면, 미디어는 '느낌'을 주고 '흥분'을 이끌어낸다. 따라서 보다 강한 '자극'을 원한다. 따라서 맛이 하나의 유행이 된다면, 미디어는 보다 강한 자극과 사람들의 격렬한 반응을 이끌어내어 보다 높은 시장성을 추구할 것이다.
이러한 추세가 일정 기간 지속된다면, 맛의 유행, 유행의 특성상 '자극'으로 표출되지 못한 다른 많은 '느낌'들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된다. 분명 그 많은 '느낌'들이 해당 '자극'을 살려주는, 나아가 '자극'으로 존재하게 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많은 사람들은 그 역할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혹은 미디어에 의해 의도적으로 배제된다.
물론, 일부 이런 류의 먹방은 평범하지 않은 음식의 양이나 여러 가지 음식의 조합을 시청자들이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하여 일종의 '경험치'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본격적인 먹방이 시작되기 전 컨텐츠로서, 본질적인 부분과는 거리가 있다. 실제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음식을 입에 넣기 직전 음식의 외관과 향을 통한 맛에 대한 상상, 입에 넣고 씹어서 느껴지는 실제 맛, 향과 식감, 그리고 식도를 통해 음식을 넘기는 느낌, 이 세 가지이다.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은 '먹는 이의 느낌'이다.
'느낌'은 보이지 않는다. 형체도 없다. 따라서 '느낌'만큼 주관적인 것도 없다. '생각'은 논리가 있어 언어로 공감을 이끌 수 있지만, '느낌'은 그렇지 못하다. 같은, 혹은 유사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만 겨우 공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느낌'을 형상화하는데 효과적인 것이 바로 '자극'이다. 일정 시간 동안 신경계를 통해 인지된 일련의 자극들의 조합을 하나의 '느낌'으로 정의한다면, 일반적인 의미의 '자극'은 한 덩어리의 느낌 가운데 그 효과가 강했던 일부의 자극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극은 강한 경우 '통증'으로 분류되기도 하며, 강한 기억으로 남기 마련이다. 다섯 가지 맛, 즉 단맛, 짠맛, 신맛, 쓴맛, 감칠맛으로 분류되는 이 '맛'들은 미각 신경으로부터 통증 수준으로 느껴지는 일련의 자극들을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누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느끼는 '맛'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한다. 빠르게는 만 7세, 늦어도 만 11세까지 경험한 각자의 맛에 대한 기억이 한 사람의 인생 전체 미각을 좌우한다고 한다. 본능적으로 어릴 때 느껴진 맛에 대한 기억에 친숙함을 갖게 되고, 인생 내내 이 맛에 대한 기억을 찾아간다는 것이다. 마치 외국에 나가 새로운 음식을 접하면 한두 번은 신기함과 색다름에 끌리지만, 많은 경우 별로 특별한 것은 없지만 집밥이 기억나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만 11세 이후에 느끼고 표현하는 맛은, 각자의 뇌리 속에 기억된 과거의 맛에 대한 기억들과 비교하는, 상대적인 느낌인 것이다.
미디어는 유행을 좇는다. 유행은 그것이 의도된 것이든 의도되지 않은 것이든 간에, 흐름 내의 취향을 극대화하고 흐름 외의 취향을 도외시한다. 유행으로 불리는 하나의 흐름은 특정 사건이나 상황 하에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드러내는 반응에서 시작된다.
맛에도 유행이 있을까. 맛은 기본적으로는 맛에 대한 기억이며, 복합적인 자극들의 집합이라고 서술한 바 있다. 하나하나의 느낌은 상대적인 것으로, 그것들 간에 공통점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수많은 '맛'을 다섯 가지로 크게 분류한 것처럼, 몇몇 큰 자극들을 가상의 기준점으로 가정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맛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시 먹방에서 중시하는 요소 중 하나인 '식감'을 생각해 보자. 식감은 촉각(혹은 통각)이다. 여간 강한 자극이 아니면 느껴지지 않는다. 입 안과 식도에 느껴지는 일정 수준 이상의 자극, 때로는 통증이 될 강한 느낌이 충족되어야 비로소 '식감'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물론 부드러운 목 넘김 등을 내세울 때도 있다. 그러나 '부드러움'이 주제가 되기 위해서는 거친 식감이 메인이 될 때 가능한 것이다.)
자극은 '느낌'과 달리 비교적 객관적 개념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정상적인 신경계를 가지고 있다면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끼리라도 서로의 공감을 이끌어내기가 쉬운 편이다. 따라서, 이러한 '자극'은 사람들 간의 공통점을 찾아 공감을 이끌어내야 할 미디어에게 유의미한 개체가 된다. 무형의 '맛'을 유형의 '자극'으로 단순화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표시하게 하면, 미디어에 의해 특정 자극이 '맛'이라는 미명 하에 하나의 유행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산업화에 의해 더욱 많은 사람이 스스로에게 음식을 공급하고 소비하는, 이른바 '모두가 주부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미디어의 발전은 더욱 쉽게 음식에 대한 관심을 충족시킬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우리 각각을 시쳇말로 '취향 저격'하는 음식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유행은 매력적이다. 개개인의 측면에서 유행은 주변인들과의 관심사 공유 등 관계적인 측면뿐 아니라, 소비 등 의사 결정에 색다른 방향성을 제시해 줌으로써 일상의 만족도를 높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경제적으로는 정체된 소비시장을 선도하는 효과가 있다. 소비를 진작시키기 때문에 산업 전반에 걸쳐 양의 파급효과를 불러온다. 비단 산업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의 생활에 역동성을 불러일으키는 등 사회 문화 전반에 긍정적인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
집에서도 음식을 사다 먹는 시대다. 이제는 김장 대신 '명인'의 김치를 사다 먹고, 젓갈을 사다 먹고, 백화점이나 반찬 가게에서 음식을 사오고, 나아가 왠만한 음식은 다 배달해서 먹는다. 데우기만 하면 되는 반제품 형태의 음식제품도 정말 많다. 음식을 만드는 행위가 소수의 주부가 있던 시대에 비해 되려 더욱 소수의 전문 셰프들의 영역으로 줄어드는 모양새이다. 음식의 '소비'는 예나 지금이나 모두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생산'은 미디어에 의한 시장성에 발맞출 수 있는 전문가들로 한정되고 있다.
요리를 업으로 하는 프로 셰프들은 다양한 능력을 지녔다. 물론, 고객 1인의 취향을 안다면, 그 취향을 저격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음식 공급자임과 동시에, '판매자'이다. 제한된 시간에 제한된 예산으로, 최대한 높은 순이익을 거두어야 한다. 재료의 퀄리티는 적정한 수준으로 조정될 것이고, 대량 생산과 빠른 조리를 위해 레시피는 대중의 반응을 고려하여 더욱 많은 이의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는 맛의 영역을 추구할 것이다.
모두가 즐거움을 원한다. 가끔은 '쾌락'을 추구하며 일상의 무료함을 달래는 것도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쾌락'에 빠진 사람을 두고 사람들은 '도를 넘었다'고 한다. 또는 '방탕하다'고도 한다. 남들도 좋아하고, 나도 좋아하는 그런 쾌락도 존재해야 하지만, 남들은 잘 공감하지 못해도 나는 무척이나 편하고 즐거운 그런 종류의 아이템도 필요한 법이다. 맛의 대 유행 속에 살아가는 이 시대, 다른 사람과 나, 모두를 적당히 충족시키는 그런 음식 말고, 오직 내 추억을 돋게 하고 내 취향을 저격했던 고향의 집밥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