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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ngwoo Kim Feb 14. 2024

조용함보다 시끄러움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미덕은 조용히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White Noise


백색 소음(white noise)이라는 말이 있다. 카페 같은 곳에서 사람들이 낮게 대화하는 소리가 합쳐져 웅성거리는 느낌으로 합쳐진, 일종의 소음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것에 "백색"이라는, 긍정적인 의미의 색상이 입혀진 것이다. 영어에서 "white"는 "별 의미 없는" "별 거 아닌" 등의 무(無)를 뜻하거나, 혹은 "white angel"에서처럼 선(善)을 뜻한다. "백색 소음"에서 "백색"은 위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지니고 있다. 


카페 효과(Cafe effect), 또는 백색 소음 효과(white noise effect)라는 말이 있다. 집이나 도서관에서 집중이 안되던 사람들이 카페에 가면 신기하게도 집중이 잘 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단지 심리적인 효과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여러 과학적 방법론을 사용한 연구가 제법 된다. 약간(?)의 소음이 되려 집중하는 데 긍정적인 효과를 미친다는 것이다. 


4절 스케치북을 떠올려 보자. 크고 하얀 종이 어딘가에 까만 점 하나를 찍어보자. 다른 종이에는 아주 작은 점의 영역만 빼고 모두 까맣게 칠하자. 두 점에 집중해 보자. 어느 점에 더 오래, 쉽게 집중할 수 있는가, 하얀 바탕에 까만 점인가, 아니면 까만 바탕에 하얀 점인가. 


무언가에 "집중"한다는 것은, 그 대상 이외의 다른 것은 일정 시간 "무시"하는 행위가 수반되어야 한다. 여기서 "무시"할 대상은, 비록 "집중"을 위해 능동적으로 인지하지 않더라도, 뇌의 자발적 반응으로 인해 그 대상이 이미 인지되고, 무시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문제는, 이 대상이 어떻게든 구분되어 "존재"해야 한다는 점이다. 


듣지 않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은 다르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한 산사(山寺). 예로부터 수많은 고시 합격자들을 배출해 낸 최고의 학술 기관(?)이 아닌가 싶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도심으로부터 벗어나 오직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흰 종이에 씌여진 검은 글자, 이것보다 밝은 빛이 있으면 글자보다 그것에 눈이 이끌리기 때문에, 빛이 가장 적은 산 속으로 향했던 거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절은 생각보다 시끄럽다. 날이 밝기 한참 전부터 허공을 울려대는 목탁 소리, 염불 소리, 아침부터 빗자루 소리, 낮에는 바람에 흔들리며 나는 풍경(風磬) 소리 등등. 산 속이다보니 각종 벌레와 짐승의 소리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바람에 부대끼는 나뭇잎 소리는 덤이다. 이 모든 "소리"의 공통적인 특징은, "의미"를 찾기 어려운 소리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일종의 "소음"이라 할 수 있겠다.


공포 영화를 한 번 떠올려 보자. 일반적으로 클라이맥스는 공포를 유발하는 무언가가 등장하는 시점, 그리고 주인공이 그로 인해 무한의 "공포심"을 느끼고 황급히 해당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련의 행위들을 시전(?)하고, 일련의 상황들이 겹치면서 여러 시/청각 효과가 맞물려 영화 관람객들의 마음 속에 영화 속 공포를 전달하는 바로 그 순간이다. 


"그 순간"은 적막하다. 보이는 것도 없는 경우가 많다. 어둠 속. 말 그대로 암흑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소리는 오로지 심장소리, 또는 발에 밟히는 흙이나 모래소리 뿐이다. 신경을 통해 들어오는 자극이 아무것도 없는 경우, 인간의 뇌는 비어있는 "인지"의 공간을 무한의 상상으로 채운다. 상상은 가능성을 기반으로 한 "기대"의 산물이다. 무서움을 느끼는 와중이라면 무서웠던 경험을 떠올리며 유사한 상상력이 발휘될 것이고, 심심함을 느끼는 중이라면 쾌락이나 즐거움을 느꼈던 경험을 기반으로 여러 가지 향락과 환희에 휩싸인 상상력의 세계를 펼칠 것이다. 별의별 상상으로 뒤덮인 인간에게 가해지는 첫번째 자극은 그래서 그 어떤 자극보다 더 강하게 느껴진다. 마치 사막 한가운데에서 접하는 한 모금의 물이 그 어떤 다른 물보다 달고 감사한 것처럼 말이다.


보이는 것도 없고, 들리는 것도 없는, 그야말로 전무(全無)의 공간은, 그 어떤 것에도 집중하기 어려운 공간이 된다. 오로지 과거를 회상하며, 경험을 기반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그런 시공간이 된다. 이 세상이 아니라 다른 세상에 뜻을 둔 이들이라면 이들 시공간에서의 경험이 놀라운 지적 자산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애초에 일련의 "목적"을 갖고 특정 공간에 구속됨을 자처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시간 낭비로 귀결될 가능성이 훨씬 높다.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딱히 의미를 부여할 만한 것이 없지만, 적어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공간으로서 산사가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고 듣지 않는" 행위를 자발적으로 극대화할 만한 최적의 환경으로서 기능하는 것이라 요약할 수 있겠다. 백색 소음 가득한 카페도 다르지 않다.


정신없는 아이


조용히 해. 시끄러워. 제자리에 앉아. 유치원 혹은 초등학교 때 숱하게 듣는 말들이다. 보통 더 높은 지위(?)로 인식되는, 인솔자 혹은 교사들이 학생 혹은 원생들에게 하는 경우가 많다. 어느 때, 어느 학교이든지 간에, 유독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어린이집 등지에서 발생하는 아동학대 사건들을 보고 있노라면, 옛날과 별반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그런(?) 류의 아이들에게는 '주의가 산만하다'는 식의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어릴 때일수록 아이들 각각의 꿈은 공통적인 부분보다 서로 다른 부분이 더 많다. 경쟁을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경험보다 각자 다른 가정에서 쌓인 경험적인 부분이 그들의 인생에 더 많은 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모르나 아이 교육에 상상력을 길러준다던지, 더욱 더 많은 것에 호기심을 가지기를 유도한다던지 하는 조언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놀랍게도 "상상력"이나 "호기심"이 인간의 원초적인 "자율성"에 기반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듯한 경우가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모름지기 "생명"을 가진 존재는 모두 "자유 의지"를 가진다.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의 경우도, 자연의 본능을 따라 적어도 "살고자 하는 의지"를 보인다. "자율성"이 없다면, 모든 행위가 훈련된 대로, 혹은 학습된 대로만 이루어질 것이다. 물론, "자율"이 보장되어 있는 경우에도, 훈련이나 학습에 일정 수준 이상 노출된 경우, 습득된 지침의 범위 내에서 행위가 발생할 것이다. 군대의 경우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학습이나 훈련 그 이전에 대상자 혹은 대상자가 속한 공동체의 암묵적 합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손을 들다


예나 지금이나, 손을 들어 발표하기를 원하는 학생은 흔하지 않은 것 같다. 묻어가는(?) 걸 최대의 미덕으로 삼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일상 이상의 일에 쏟을 에너지가 없는 건지 알 수 없다. 남들보다 나아지기 위한 "경쟁"이 사회 전반적으로 일상화되어 있고, 시간이 갈수록 승자를 찾기 어려운 경쟁이 모두의 미래를 담보로 잡고 있는데도, 정작 남들 사이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만의 생각을 표현하는 일에는 주춤한다. 


대중이 알아야 하는, 긴급한 무언가가 있다면 기꺼이 손을 들어 알린다. 이것은 옛날에 비해 일반이 된 것 같다. (과거엔 참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과는 종류가 다른 일이다. 공공의 안전을 위한 일이다. 동시에, 개인의 안전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미약하게나마, 공공과 개인에 대해 인식하는 가치의 수준이 향상되었다고 해야 할까.


조용한 산사, 깊은 숲 속 암자, 오로지 바람소리만 들리는 곳에서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풍경 소리, 사방이 하얀 눈밭에서 오로지 내 발걸음에 따라 밟히는 뽀드득 소리. 이런 고요함과 고즈넉함을 한국의 전통적인 정취가 있는 모습 등으로 표현하곤 한다. 그러나 동시에, 장터의 시끌벅적함 속에서 사물놀이가 흥겹게 벌어지고, 한쪽에서는 흥겨운 노랫소리가 가득한 모습 또한 노래와 흥을 즐길 줄 아는 한민족의 모습이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좀 더 파고들어 보면, 전자의 모습은 선비의 정취이고, 후자의 모습은 서민의 정취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민주공화정 대한민국 이전, 한반도의 통일국가였던 조선의 지배계층을 생각해보면, 어느 쪽에 여전히 손을 들어 주는지 알 수 있다. 


만장일치가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만장일치가 이뤄진다면, 결정에 필요한 시간도 비용도 줄일 수 있다. 따라서 공감대 형성이 중요하고 투표자들에 대한 설명회 같은 것을 적극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만장일치를 지향하는 것은 지양해야만 한다. 


(국회 등 국가지대사를 결정하는 자리에서) 만장일치가 제일 많이 일어나는 곳은 바로 일당체제 혹은 강력한 독재체제이다.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다양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이런 다양성을 공동체가 적극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다양한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뜻이다. 이론적으로는 비민주공화정 체제에서도 가능은 하다. 그러나 확률이 낮다. 역사 속에 현명한 군주가 몇이나 있었고, 군주의 삽질로 국가가 무너진 횟수가 얼마나 되는지를 헤아려 본다면 알 수 있다.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은 절대 조용하지 않다. 시끌벅적한 수준을 넘어, 싸움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싸움이 날 만한 상황을 억지로 주저앉히는 것도 좋지 않다. 의견 수렴의 과정은 사람들의 다양한 수요에서 일부를 취하고 일부를 버리는 과정이 필연적인데, 욕망이 본능인데 버리는 과정은 반드시 화를 부르기 때문이다. 수렴의 과정에서 싸움은 서로 해하여 절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수렴의 과정에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화를 소모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다. 


민주공화국의 필수 요소 중 하나인 국회는, 그 정의를 따르면, 국민의 정치에 대한 권리를 대리하는 국회의원들이 국사에 대해 회의하고 의견을 나누고 다름을 수렴하여 국정을 이끌어나가기 위한 기관이다. 국회의원 한 명 한 명은 그들이 선출된 선거구에 포함된 사람들의 다양성을 대표한다. 이론적으로 국회의원 전원은 해당 국가 국민 모두의 다양성을 대변해야 한다. 지역사회에서 의견을 수렴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국회에서의 그것은 결코 잠잠한 상태로 순조롭게 흘러가기 어렵다.


다양성의 수용이 미덕이어야 한다


과거보다 현재가 나아야 하고, 현재보다 미래가 나아야 한다. 미시적으로는 반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거시적으로는 분명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상향이어야 한다. 발전해야 할 대상은 여러 가지가 있다. 경제적인 부분도 있고, 인권적인 부분도 있고, 교육이나 법 같은 사회 시스템도 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아우른다면, 한 공동체 내 더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수요를, 더 많은 종류를 커버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경제적으로는 양적인 충족을 넘어야만 하고(*한계효용), 인권이나 시스템에 대한 수요는 애초에 양적인 것보다 질적인 부분에 치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끄러움을 넘어 소란스러움을 방관해야 할 필요는 없다. 수요와 수요가 서로 충돌하면 당연히 소란스러워 진다. 이 소란 자체를 지양할 필요가 없다는 것 뿐이다. 소란스러움이 극에 달하면, 들려야 하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극단적인 예시는 바로 액티브 노이즈캔슬링이다. 소리에 그 반대 파형의 소리를 덮어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하는 원리다. 들리는 소리에 민감성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는 제어되어야 한다.  


자연스럽게 조용한 공간은 특정 목적에 대해 암묵적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유없은 조용함은 구성원들의 목적이나 수요를 알기 어렵다. 물론 모든 종류의 시끄러움이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시끄러움에 실체가 숨겨져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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