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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ngwoo Kim Apr 02. 2018

이렇게 오래 있을 줄 몰랐다

어디사냐고 물으면? LA.

너는 어디 살아? 

라고 하면 망설이지 않고 엘에이...라고 대답한다. 경제권 기준 엘에이에 포함되기는 할 것 같다. 차 안막히면 엘에이 다운타운까지 차로 사십 분 (대중교통은 무늬만) 비록 카운티도 엘에이 카운티가 아니라 샌버나디노 카운티 (몇달 전, 총기 테러사건 났던 동네 근처다) 라 깊게 파고 들면 할말 없기도 하지만. 


그런데,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엘에이를, 올해 한 번도 간 적이 없다. 엘에이에 사는데 엘에이에 간 적이 없는 것. 엘에이에 사는 게 아닌 것이다. 마치 외국인이 나보고 한국 어디서 왔냐고 하는데 거기다 대고 거제도라는 얘기를 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얘기다. 얘기해봐야 한국의 남쪽에서 왔다고 하겠지. 부산 정도 알려나. 


나름 카운티 청사도 있는 꽤 큰 도시(?)에서 살지만, 도시 이름도 또 무슨 인디언 부족의 고유 언어에서 온 이름이라, 미국 도시같지 않은 색깔(?)의 이름의 도시이다. 지금은 동네에 딱히 빈 땅도 없고, 있다면 벌써 개발중이고, 엘에이 만큼은 아니겠지만 프랜차이즈가 아닌 괜찮은 다양한 식당들도 꽤 있는 편이다. 근처(십분 거리)에 있는 공항에도 나름 국내선이 짱짱하게 들어와서 꽤 탈만한 노선들이 있는 편이다. 병원은, 근처에 있지만 가지 않는 편이 훨씬 정신건강에 좋기 때문에 의미없는 얘기일 뿐. ㅋ


근데 왜 거기 살아?

라고 물어오면, 남들은 사오년 걸린다는 박사과정을 당최 몇 년을 하려고 아직도 살고 있는건지. 학교에서 자전거타고, 걸어서, 혹은 카풀 받아서 술병들고 찾아와서는 밤새 술판 벌이는 상황을 몇 번 맞이하다 보니 (기숙사보다 밤새 술마시기 편하다나 뭐라나), 다른 이들과 달리 도서관보다 집에서 공부하는 것을 선호하는 나의 특성상, 건전한 대학원 생활을 위해서는 적당히 학교에서 거리가 있는 집이 좋겠구나 해서 이 동네를 찾아들어 왔었다. 


내가 처신을 잘못한 건지, 아니면 술 좀 마시겠다는 게 뭐라고 나이도 어린 게(그때기준) 멀리 이사가서 밉보인 건지, 도서관에서 주기적으로 담배피며 수다 좀 떨어줘야 하는데 집에서 공부를 하다보니 안낀건지 못낀건지. 벌써 다들 한두번 이상 돌려본 족보도 나는 그런게 있는지도 몰랐고, 마치 내 스케쥴 있는 시간에 딱 맞춰서 하는 것 같은 세미나에 파티에. 가끔 마주쳐서 뭐하냐 물어봐서 대답하면, 왜 자기 주제 근처에 오냐며 딴데 가라고 뭐라 그러지를 않나. 뭐 좀 물어보면 너 잘 하잖아. 한 번 부딪혀봐. 니가 깨우쳐. 항상 이러면서. 


공부할 수 있을만큼 조용하면서 교통도 좋아야 하고, 집값도 비싸지 않아야 하고(소도시지만 전세개념이 없는 미국은, 특히 엘에이라는 대도시가 근처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월세가 한국인들이 생각할 수 없는 수준으로 비쌌다), 먹는 것도 잘 해결될 수 있어야 했다. 그렇게 흘러흘러 온 곳이 이곳이었다. 


한국 마트가 있었어. 학교에서 집에 가는 길에.

그렇다. 정말 있었다. 이곳으로 이사오고 일년 뒤에 없어져서 문제지. 없어질 것을 알았다면 과연 이 곳으로 왔을까 자문해보면. 하아. 지금의 요리실력을 가진 상태라면 모를까 그 당시의 내 요리의 수준은, 마트가 닫는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나의 심정은. 하아.


마트에서 파는 각종 반찬들. 특별한 맛은 없었지만 그래도 나름 밥을 넘길 수준은 되었기에. 그리고 피자와 햄버거, 샐러드가 다인 미국 학교 식당. 경제학과가 이런 가성비 나쁜 음식을 먹어도 되나 하는 자문자답을 하게 만든 그 식당. 그것보단 분명 가성비가 높았으니. 요리실력이 높으면 높을수록 재료관리-조리시간-요리계획 등에 투자하는 시간이 크게 감소한다. 따라서 그 당시에는 요리에 시간을 쓴다는 것 자체가 학사관리의 실패를 떠올릴 만큼, 한국마트의 폐쇄는 나에게 큰 위기로 다가왔다. 


당시는 서브프라임모기지 끝물. 물론 매장 재계약 실패의 근본적인 원인은 다른 곳에 있었다지만. 지금 와서야 내가 저질렀던 수많은 식자재 관리의 실패와 요리 실패 등의 기억이 웃음으로 지나가지만, 그리고 내 요리 실력의 훌륭한 밑거름이 되었지만. 그리고 이제는 미국 마트에서도 한국음식에 쓰이는 많은 식자재를 팔지만, 그리고 어디에나 있는 중국 마트에서 김치도(!) 팔지만. 그리고 동네 근처에 한국 라면 공장이 있는덕에 한국 라면이 들어와 있지만(난 라면을 먹지 못하는 한국인 ㅠㅠ) 그렇지만. 또 그렇지만. However. 결코 되돌이키고 싶은 추억은 아니었다. 


한 곳에서 오래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즐거운 추억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난 지금껏 한 집에서 5년 이상 살아본 기억이 없다. 한 번 빼고. 내가 기억을 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 두 살부터 열 한살까지, 9년을 거제도 장승포시의 한 아파트에서 살았었다. 그 이후에는 동네는 같았어도 이사는 계속 다녔었던 것 같다. 그런데 바다건너 이 미국 땅, 한 집에서 산 지가 벌써 8년이 다 되었다. 


동네가 변해가는 모습을 본다는 것. 저 집 안없어지나 했던 집이 없어지고 더 이상한 집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는 것. 저 공터는 대체 언제쯤 개발이 될까 했는데 지금은 삐까뻔쩍 쇼핑몰이 들어서 있고. 비 안온다는 엘에이에 홍수가 나는 모습을 보기도 하고. 비보다 태양을 피하는 방법을 더 잘 알것 같은 삶을 살지만 가끔씩이나마 밖을 보며 마치 내 삶이 태양을 한가득 안고 있는 것처럼 작렬하는 태양을 만끽하기도 하고. 학교에서 쓰는 영어보다 훨씬 못한 나의 생활영어로도 먹고 사는데 아무 지장없이 사는 나를 발견하면서도 당연한 듯 무덤덤. 삶이란 다 그런건가 싶기도 하다가도 내가 어느 새 고인 물이 되어버려서 그런건가 깜놀하기도 하고. 


사는 삶이 즐거워야 하는데 그 삶의 바깥에서 그 삶을 바라볼 때 비로소 즐거운 추억이라 느끼는 게 아닌가 싶어 섬찟하기도 하지만. 어쩌랴. 살아내어야 하는 삶인 것을. 


끈기가 약한 사람

은 큰 일을 못한다고 어른들은 그랬다. 나는, 끈기가 강한 척을 잘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참 무엇인가에 잘 질린다. 음식도, 공부도, 일도. 오랫동안 잘 앉아 있었던 것은 내가 하고 있던 공부를 즐겼던 것이고, 엉덩이가 무거웠고 운동을 싫어했을 뿐이었다. 학교 공부는 시시각각 내용이 바뀌었고, 질리기에는 과목이 많았고, 학기라는 중요한 반환점이 매번 존재했다. 엄마가 해주는 반찬은, 전라도의 친가와 이북의 외가가 만나서인지 몰라도 다양했고, 뭔가 한 가지를 길게 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그 진실을 알게 된 것이 얼마 안 되었다는 것 뿐. 


만성 변비를 가진 나는 큰 일을 잘 못보기는 한다. 거의 평생 그랬던 것 같다. 병역 의무를 수행할 때도, 다행히 육군이 아닌 해군이었고, 해상병이 아니라 육상병이었고, 어찌어찌 좀 편한데로 잘 빠져서 있을 때도 변비는 날 괴롭혔다. 변기 위에서 오래 앉아있는 끈기는 없을 수록 큰 일을 잘 맺을 수 있었다. 쓸데없이 그런 끈기는 내가 참 강했다.


하나의 주제를 파고 또 파는 이 과정. 코스웍이 끝난 이후의 학위과정은 내게 지루함의 연속이었다. 바쁘기는 했다. 뭐라도 해야 했고. 뭔가 하고 있었는데 들려온 지도교수님의 비보. 사년 간 들었던 코스웍은 어쩌고. 필드에는 아무도 안 계시고. 나만 겪은 상황은 아니었지만 남들 다 하는 finance에서 발을 완전히 뺀 나로서는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덕분에 라스푸티차를 연상하게 되는 길 한가운데서 허우적대고 있는 중이다. 이러니 오도가도 제대로 못하고 시간을 이렇게 끌지. 그렇다고 세상을 떠나신 그분께 화살을 돌릴 수도 없고. 


또한 덕분에, 경제학과는 하등 관련이 없는 여러 분야에 손을 대고 또 돈을 쓰고 또 시간을 쓰고 하다보니. 과연 내 분야는 무엇일까. 내가 무엇으로 벌어먹고 살게 될 것인지 당최 예측이 안되는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이 블로그도 그런 일종의 상황인 것 같기도 하고. 사진 찍는 것 정도까지는 취미로 봐줄 수 있으려나. 교회에서 다년간 예배팀 방송실 자막러로 섬긴 경험은 또 어쩌고. 중식 일식 동남아식 인도식까지 연구하고 시도하는 요리도 그렇고. 어느새 짐벌에 드론에. 영상촬영에 이제는 (정말 부족하지만) 영상프로젝트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영상 편집에 기획에. 유튜브 각종 클립을 보면서도 내용보다 색감 이쁘다 구성을 저렇게도 하는구나 카메라를 저렇게 돌려야 하는 거구나 이런 것들을 깨닫는 나를 보면서. 하아.


빨리 하자. 

라고 하면 이미 빠른 건 지났잖아 라고 말하겠지만. 사람은 과거를 살았고 또 미래를 보며 살아가는 것은 어쨋든 현재 이 순간일 뿐이니. 


내가 이렇게 살고 있을 줄 몰랐으니. 내가 일년 뒤에 어떻게 살고 있게 될지 모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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