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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오기 전, 미국에서 오랫동안 갈구하던 것이 있었다. 근 6년여 간, 한국에 들어오지 못했었다. 혼자 다니는 여행도 워낙 좋아하는 터에, 그 외로운 해외 유학 마지막 연차에, 코로나까지 터져버렸다. 혼자 사색하고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에 충분히 익숙하고 즐기는 편이지만, 그것을 수년에 걸쳐 방 한구석에서 하고픈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내 여행은 도시와 거리가 먼 곳을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국에서도 교통체증을 피해 스카이라인이 낮은 곳을 주로 맴돌았다. 엘에이 광역권에 거주하기는 하지만, 정작 city of LA는 일년에 많아야 두세 번 가는 정도였다. 미국에서 나의 30대를 온전히 보낸 탓에, 자차로 크루징하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교통체증을 끔찍이도 싫어하고, 새로운 길을 새로운 환경 아래에서 맞이하는 것을 좋아한다.
길이 더 멀더라도, 갈 때 운전한 길과 다른 길로 운전해 오려 하고, 날씨가 바뀌면 산도 나무도 달라지니까 나에겐 새로운 길로 인식된다. 추울 때 보는 모습과 따뜻할 때 보는 모습은 가고 오는 길부터 모든 것이 내게는 다른 것이 된다.
비록 다른 학문을 전공했지만, 오랜 시간 역사와 지리를 좋아했다. 좋아하는 것을 전공하지 못한 것은 안타까우나, 역사와 지리, 그리고 내 전공인 경제를 합쳐서 이슈를 바라보는 시각이 생겨났다. 그러다보니, 박물관에 들어와 있는 유물을 볼 때도, 텍스트를 읽을 때도, 산이며 들에 자리한 유적지를 바라볼 때도, 다양한 사색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호사를 누리는 중이다.
최근에는 성곽이 있는 유적지를 많이 방문하게 되었다. 성은 성벽을 기준으로 안과 밖의 스토리가 나누어진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성 내부가 하나의 스토리로 연결될 수도 있고, 높은 고저차 또는 내성 등을 통해 그 안에서도 스토리가 나뉠 수 있다. 마을 내에서도, 높은 울타리로 인해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는 안과 밖의 스토리가 분리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울타리가 있어도 안팎의 시선이 흐르는 데 지장이 없다면, 그 울타리는 각자의 경계 그 이상의 기능을 하지는 않는 것이다.
박물관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작은 주제별로 전시관을 나눠놓는다. 시간 순서대로, 국가별로, 혹은 유물의 종류별로 나뉘어져 있다. 관람 방향도 친절히 안내해준다. 안내된 방향대로 발걸음을 옮기다보면, 시선의 흐름이 일정하게 발생한다. 그 시선의 흐름이 끊기지 않고 연속되어 박물관 전체를 훑는 것은, 단지 전시실의 배치 뿐 아니라, 유물의 배치 뿐 아니라, 각 전시실에서 제공하는 유물에 대한 설명이나, 역사의 배경에 대한 담론이 동시에 그 시선의 흐름을 이끌 수 있어야 한다. 내용은 분리되어야 하는데 시선은 흐른다면 스토리의 플롯 구분이 해당 지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박물관도, 유적지도, 문화재도, 시간을 버텨 온 산물이고, 그들이 제대로 기능했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내가 발걸음을 옮기면, 다른 시대 다른 스토리가 보인다. 그러나, 내가 그 시간을 딛고 서지는 않는다. 단지 조망할 뿐이다. 개입하는 상상을 하지만 그 어떤 상상을 해도 흘러간 대로 흘러갈 뿐이다.
비행기는 주로 '날아간다'고 한다. 방향성이 뚜렷하고, 대부분 지점간 이동의 목적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새는 주로 '난다'고 한다. (제철의 철새는 날아간다고 한다) 박물관에서 발걸음을 옮기지만, 내 시선은 일정하지 않다. 뒤로 가기도 하고, 잠시간 호버링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람따라 떠밀려가지는 않고, 최대한 나의 의지로 움직인다. 내가 조종하지만, 많은 전자제어 소프트웨어의 힘으로 바람을 버텨가며 움직이는 드론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