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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디맘 Nov 02. 2018

대머리 엄마

엄마가 한쪽 가슴에 적응해갈 무렵, 초등학교 4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길가에는 노오란 개나리꽃이 흐드러지게 펼쳐져 있고, 곳곳에 분홍 진달래가 수줍게 얼굴을 내미는 어느 봄날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거실에서 빨간 색종이로 장미꽃다발을 만들고 있었다. 유난히 꽃을 좋아하는 엄마는 길을 가다가도 예쁜 꽃이 있으면 한 줌 꺾어, 목이 긴 화병에 담아 온 가족이 볼 수 있도록 거실 한편에 꽃을 꽂아두었다.


그날도 정성스레 꽃을 접는 엄마의 얼굴엔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옆에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에게 엄마는 말했다.     


“동연아, 엄마 머리 좀 잡아볼래?”     


아무 생각 없이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그 순간. 내 손에는 힘없이 뽑힌 엄마의 머리카락들이 뒤엉켜있었다.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목구멍으로 올라왔지만 꾹 삼켰다. 뽑힌 머리카락이 있던 자리에는 하얀 두피가 휭하니 드러났다.      


“엄마가 항암치료 다시 받기로 했어. 이제 엄마 머리카락 계속 빠질꺼야.”     


암이 재발한 것이었다. 그 뒤로 엄마의 머리카락은 무섭게 빠지기 시작했다. 숱이 많아 언제나 숱을 쳐내던 엄마의 풍성한 머리는 옛말이 되었다. 이제 민머리를 훤히 드러낸 ‘대머리 엄마’가 되었다.


엄마는 자신의 민머리를 가려줄 반커트 모양의 단정한 가발을 장만해서 장롱 한편에 놓아두었다. 가발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게 거치대에 걸어두고, 가발을 쓰지 않는 날에도 매일 촉촉한 에센스를 정성껏 발라주었다. 푸석했던 가발은 엄마의 정성과 사랑을 먹자 어느새 윤기가 흐르고 생기가 도는 ‘진짜 머리’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가발은 가끔씩 전문 미용사에게 손질을 받는 호사도 누렸다.



가발이 처음 우리집에 온 날, 동생과 나는 처음 보는 가발이 무척 신기하고 재미있어 보이는 놀잇감이었다. 그래서 엄마 몰래 가발을 쓰고 춤을 추고,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다가 엄마에게 들켜 호되게 혼났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외출할 적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정면에서 보고, 양 측면에서 보고, 뒤에서 보고, 그리고 여러 차례 나에게 물었다.     


“엄마 머리 어때?”

“자연스러워?”

“가발 같아?”

“이상하지 않아?”

“여기 볼륨을 더 넣어야겠지?”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에 나의 대답은 언제나 짜증 섞인 세 마디였다.     


“괜찮아.”     


엄마가 가발을 쓰고 나서부턴, 더운 여름과 강한 바람이 부는 날을 싫어했다.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어느 여름날, 엄마는 말했다.     


“머리 속이 뜨겁게 익는 것 같아.”     


성미가 급한 엄마는 집에 돌아오면 가발부터 벗었다. 보통 여자들이 집에 돌아와 가슴을 조여주던 브라를 벗을 때 느끼는 그 순간의 쾌감과 안식을, 엄마는 가발을 벗을 때 느꼈다.     


“하...이제 살 것 같아.”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대머리 엄마는 연신 부채질을 하며 뜨거웠던 머리를 식혀주었다. 엄마의 맨머리 중앙에 자리 잡은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부채 바람과 한 몸이 되어 힘없이 흩날렸다.


엄마의 앞날도 몇 가닥의 희망과 함께 위태롭게 흩날렸다.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에는 엄마는 유독 긴장을 했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이 비장한 마음으로 신발끈을 강하게 조이는 것처럼, 바람에 가발이 벗겨지지 않게 가발 안쪽 끈을 평소보다 팽팽하게 조였다. 엄마는 팽팽하게 조인 끈처럼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수시로 거울을 보며 머리를 챙겼다. 덩달아 나까지 마음 졸이며 엄마의 머리를 쳐다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그랬다.

자신이 대머리라는 엄마 자신의 수치심보다 대머리 엄마 딸이라는 게 창피했고,

한쪽 가슴으로 사는 여성으로서의 수치심보다 한쪽 가슴만 있는 엄마가 창피했고,

바람 앞에 작아지는 무기력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씁쓸했을 엄마보다 엄마의 가발이 탄로 날까 불안했던 내가 있었고,

극심한 통증과 홀로 싸워야 했던 고독한 엄마보다 아픈 엄마가 보기 싫어 방문을 닫아버린, 엄마의 고통을 외면한 철없던 어린시절의 내가 있었다.



#. 엄마 이기전에 한 여자


(띠띠띠 띠)     


늦은 저녁,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난다.


신랑이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신랑이 비밀번호를 누르는 순간부터 집안에 들어오기까지 나는 매우 분주해진다. 풀었던 브라를 재빨리 채워 축쳐진 가슴의 볼륨감을 살려주고, 종일 육아와 살림으로 엉클어진 내 머리와 옷매무새를 거울을 보며 말끔히 정돈한다.


컨디션이 좋은 날엔 달콤한 향수를 양쪽 손목 안쪽에 톡톡 뿌려주고, 촉촉한 립글로스를 입가에 살짝 발라 생기를 준다. 이 모든 행동이 불과 2~3초 만에 이루어진다.


나의 이런 행동에는 여전히 신랑에게 여자로 보이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깔려있다. 오늘도 신랑이 퇴근할 즈음, 거울을 보며 머리를 정돈하는데 문득 민머리 엄마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 아빠가 퇴근할 무렵, 거울 앞에 앉아 민머리를 어루만지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던 엄마의 얼굴이 겹쳤다.


엄마도 엄마이기전에, 아내로서 남편에게 사랑받고 싶은 한 여자였던 것이었다. 그것도 불과 현재 내 나이와 비슷한 36살의 젊은 여자였다. 그 사실을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 엄마와 비슷한 나이가 되어 뒤늦게 깨달았다.


엄마도 엄마이기전에 한 여자였다는 것을.


남편을 맞이할 때, 남편의 귀가가 늦어질 때, 남편과 사랑을 나눌 때, 남편에게 사랑을 받고 싶을 때 더이상 여자로 느껴지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무수한 날들을 혼자 주춤거렸을까.


중년의 여성들이 갱년기가 시작되면 생리가 멈추면서 여자로서의 인생이 끝났다고 느낀다고 한다. 비록 외적인 모습은 변함없을지라도 본인 스스로가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여자로서의 엄마의 인생은 어쩌면 암과 함께 끝났는지도 모른다.


암은 엄마의 한쪽 가슴을, 엄마의 머리카락을, 엄마의 청춘을, 여자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을 빼앗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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