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디맘 May 11. 2020

엄마, 나 시집가면 김치해줘

늦은 저녁 무렵, 큰 딸아이와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올해 8살 된 딸아이가 갑자기 뜬금없이 나에게 말했다.

"엄마, 나 시집가면 김치 해줘."

이 한 마디가 문득 나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아이는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보았다.

8살 된 아이 입에서 벌써, 아니 어떻게 저런 말을 할까라는 호기심 어린 눈빛을 짓기도 전에 내 심장은 갑자기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무언가 대답을 해야 하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까스로 정신을 챙기고 아이에게 힘주어 이야기했다.

"으응. 엄마가 세은이 시집가면 김치 엄청 많이 담가줄게!."

아이는 내 대답에 만족했는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하던 놀이를 이어갔다. 놀이에 다시 심취해있는 아이를 바라보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나의 가슴을 파고들었던 이 한 마디.

'엄마 나 시집가면 김치 해줘'

어쩌면 내가 엄마에게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결혼하기 전에는 몰랐다. 김치가 식탁에 중요한 반찬이라는 것을.
흔하디흔한 그 김치가 우리 집 냉장고엔 없었다.
그땐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김치를 담글 용기도 없었고, 인터넷으로 김치를 주문하는 것도 생각지 못했다. (지금은 인터넷으로 김치를 주문해서 먹는다)
가끔씩 김치 생각이 나면 그저 마트에서 장을 볼 때 소분해서 파는 김치를 끼어 사 오는 정도였다.

결혼을 하고 나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주변 친구들은 대부분 친정엄마가 담가주는 김치를 받아서 먹었다. 김치뿐 아니라 반찬, 매실액, 참기름 등 친정엄마의 정성이 담긴 식재료를 받기도 했다.
나에게는 김치를 담가줄 친정엄마도, 부탁할 사람도 마땅치 않았기에 허전한 냉장고를 볼 때마다 내 마음도 허전했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엄마의 빈자리는 여전히 내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새댁 시절, 엄마에게 하고 싶었던, 아니 할 수 없어서 마음 깊은 곳에 꾹꾹 눌러두었던 그 말.

'엄마, 김치 담가줘.'

남에게는 지극히 평범하고 지극히 일상적인 그 말이, 나에게는 사치스러운 말처럼 느껴졌다. 내가 딸로서 너무나 하고 싶었던, 간절했던 말을 엄마로서 딸아이를 통해 듣게 되니 가슴 한편 이 시려왔다.

비록 내가 받지 못했지만 내 딸아이에게는 반드시 해주고 싶다.
딸아이가 시집가면,
매년 김장철이 되면 김치통에 김장김치를 수북이 담아 딸아이의 손에 건네주고
매실 철이 되면 정성껏 매실을 씻어 설탕에 저민 엑기스를 통에 넣어주고
여름이 되면 칼칼한 열무김치를, 겨울이 되면 시원한 동치미를 담가주고 싶다.
살림이 손에 익을 때까지 딸아이가 좋아하는 반찬을 만들어 보내주고
딸아이가 출산을 하면 부드러운 산모 미역에 육즙이 많은 탱글탱글한 소고기를 찢어 구수한 미역국을 손수 끓여주고 싶다.

딸아이가 물었던 말에 생략된 나의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살아있어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는 왜 '죽음'에 대해 말하지 않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