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 change, 미움받을 용기, 안태근, 미투, 연애의 법칙
문을 여니 개 한마리가 격하게 날뛰며 집을 찾아온 손님을 향해 사납게 울부짖는다. 가족들은 자기 개가 물어도 크게 개의치 않고 상처를 치료하고, 난폭한 이를 드러내는 개를 대신해 방문객에게 미안함을 말한다.
외출할 때면, 총알처럼 앞으로 튀어가 줄에 끌려다니기가 전부여서, 산책이 아니라 한바탕의 난장이다. 어릴 때는 너무 착하고 귀여웠던, 이제 두 살 갓 넘은 암컷 개 후추의 이야기이다...
커플끼리 말로 주고 받기도, 거리의 신호등으로, 법으로 정해져 있기도 한데, 개를 사람처럼 대하며 키운다고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과 개도 약속은 존재해야 하며, 그 약속에 대한 타협은 하지 않는게 좋다.
아이들만 집에 있는 경우에는 개가 돌발적으로 공격할 수도 있다. 공간의 지배는 개가 아닌 사람이 해야한다는 확실한 관계 형성을 하고, 짖음과 공격으로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음을 알려줘야 한다. 왜?
잘못 길들여진 공격적인 강아지를 다시 돌려놓기 위해서, 친근한 말투는 잠시 미루고, 이유 없이 만져주지 않고, 개와 거리를 두고 규칙을 지키도록 유도하고, 또 그럴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줘야 한다.
강아지가 좋은 매너를 갖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는 단호함을 보여주는 압박이 중요하다. 하지만 압박을 위한 압박이나 도를 넘는 압박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 단호한 압박 신호를 개가 인지한다면 공격성을 누그러뜨리는 바디랭귀지 신호를 보낼 것이다. 그리고, 규칙을 지켰을때 비로소 칭찬해야 한다. 하지만, 개는 사람보다 예측이 어렵기에 단호함과 압박과 완화의 과정에서도 천천히 응시하며 완급 조절을 하여 스트레스를 지나치게 높히지 않아야한다.
나는 막내였다.
어릴 때부터 존중받지 못하고 자랐다는 생각에, 나의 의견이 무시되거나 이유없는 부당함, 직급이나 나이를 이용한 찍어누름 등에 대해 나는 분노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나는 정당성,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철학이 다른 이들보다 더 확고하다.
반려견 훈련사 강형욱씨에 대해 내가 드는 생각은 서양의 육아와 교육법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다시 두 가지로 나눠 생각해보면...
첫째, 강압적이지 않으며 기다려준다. 둘째, 훈련에 숨은 의도가 있으며 논리적이다.
위에 말한 내 성향의 이유로 나는 강형욱 훈련사를 좋아하는데, 그의 훈련 스타일과 이론이 성급하게 강제로 행동을 유도하려 한다거나 강압적이지 않으면서도 단호하고, 원하는 행동을 유도하거나 원치 않는 행동을 예방하는 행동들에 대해 논리적으로 수긍이 가기 때문이다.
서양스러운게 무엇일까? 나는 한국과 서양의 문화를 모두 매우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 것에 대한 무비판적 선호에 대해서는 반감이 매우 큰 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느낀 한국에 비해 서양이 더 우수한 점은 조급함이 적고, 시간을 들여 정보와 목적을 잘 설명하고 기다려주어 '결국, 더 깊이 이해' 시키려는데 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명령, 복종 등에 대해 우리보다 매우 제한적이다. 중세에서 현대까지 이르는 서양의 전쟁사를 보면 살육과 난폭함의 역사라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시대 그들의 삶과 일에 강압성이 제한적인 이유는 그들 자체의 심성이 고와서가 아니다.
효율과 생산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업무의 인수인계나 공적, 사적인 관계와 관련된 대화에 훨씬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인다.) 결국 그게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전달하려는 정보와 의견을 충분히 설득력있고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서양인들이 한국인보다 훨씬 긴 대화를 하는 패턴을 나는 자주 목격했다. 7-80년대 한국, fast follower 시절의 빨리빨리 사고방식에 익숙한 이들은 -질 보다 양, 소프트웨어보다 하드웨어에 더 큰 무게 중심이 있었으므로-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여유가 없고 조급해한다.
자신의 마음상태나 생각을 편한 마음으로 표현할 기회가 적었으니 잘 표현할 줄 모르는 것 역시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나 그렇게는 상대를 효과적으로 이해시킬수도, 마음을 얻을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강형욱 훈련사의 부드러운 단호함이 우리의 삶과 일, 사랑과 관계에 가장 강력한 레토릭이라고 단언한다.
혼내거나 강요하지 않음에도 결과가 더 좋은 것은 개 훈련에만 통하고 사람은 혼나야 정신차리는 존재들인가? 우리가 개만도 못한 존재가 아닌 한 그건 아닐 것이다. 혼내거나 긴장시키고, 불안감을 조성해야만 말을 잘 듣고, 일을 더 잘한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스스로 구시대의 유물이거나 커뮤니케이션에 무지한 사람이다.
안태근 성추행 사건에 대해 고발한 서지현 검사의 예를 보듯, 부당함에 대해 단호함을 보여주는 것은 당사자의 억울함만을 풀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나는 이것이 또 하나의 죽일놈 만들기나 국민적 공분에서 멈추는게 아닌, 이 상처의 치유 과정을 통해 서로의 이해의 폭을 넓혀 결국 우리의 자산을 더 살찌우는 소중한 성장의 기회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사랑에, 커뮤니티에, 사회에...
이런 부드러운 단호함이 어디서든 잘 작동되면, 사랑으로 착각하여 방종의 씨앗을 베푸는 무지한 반려견 주인들처럼 피곤한 하루를 살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진정 나를 원한다면 내 입장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대신, 나도 꼭 그렇게 하겠다는 약속도 상대에게 해야 한다. 그러면 모두 조금 더 행복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