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가니 어머니가 버선발로, 아버지는 맨발로 아들을 맞는다. 개를 잡고 돼지를 잡아 마을 잔치판이 벌어졌다. 나서기 좋아하는 자경대 대장 5촌 아저씨는 그를 부추겨 연설을 부탁한다. 학교 운동장에 모인 마을 사람들 앞에서 그는 한국전쟁은 6월 25일 북한의 불법남침으로 발발하여 많은 동족이 피를 흘리게 되었지만 이제 곧 국군이 압록강까지 치고 올라가 공산당을 무찌르고 통일을 이룰 것이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멋진 연설을 한다. 가족들에게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아쉬움을 뒤로하고 부대로 복귀한다. 그것이 부모와 이생에서의 마지막 이별이라는 것을 꿈에도 모른 채…
엄한 벌을 받을 각오로 귀대하지만 부대장은 없던 일로 눈감아 준다. 그의 잘, 잘못을 따질만한 시간도 여유도 없는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UN 군과 국군은 다시 후퇴의 길로 나서게 된다.
그는 고향집에 가며 부대에서 얻을 수 있는 미군들이 사용하던 군용 담요와 군복, 비상식량과 약품들을 손이 가는 데로 상자에 담아 가지고 갔다. 그리고 그동안 월급을 받아 모아두었던 돈을 모두 털어 아버지 손에 쥐어 드리고 왔다. 만주로 야반도주를 하며 훔쳐 가지고 갔던 아버지의 소 판 돈의 몇 배나 되는 액수였다.
할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 돈과 물건들을 땅에 뭍은 독에 넣어두고 가끔씩 식구들 몰래 꺼내보곤 했다고 한다. (후에 아버지가 북한을 방문하여 동생들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 물건이 발각되면 받게 될 징벌이 무서워 후에 이 물건들과 화폐를 당국에 신고하고 갖다 주었다고 한다. 남한의 화폐였던 그 돈들은 대남공작에 사용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국군은 1.4 후퇴로 다시 서울을 내어 주지만 3월에 서울을 재탈환한다. 그 후 전선은 38도선 부근을 오가며 별 진전을 보이지 못하다가 휴전을 하고 만다. 전쟁 직후인 1953년 사회부(현 행정자치부)가 추산한 북한 피란민 숫자는 61만 8721명. 이들은 평생 가족과의 재회를 꿈꾸며 살았지만 이중 가족을 다시 만나본 이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리고 이제 그 숫자는 매해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
그 와중에 외할아버지는 딸의 배가 불러오는 것을 감지하고 이곳저곳에 수소문을 한 끝에 아버지의 주둔지를 찾아가게 된다.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처자와 재회한 아버지는 그녀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때 결혼사진을 보면 마치 영화 “사관과 신사”를 연상시킨다. 하얀 제복을 입은 사관들이 도열한 가운데를 같은 제복을 입은 아버지와 꽃으로 테를 두른 면사포를 쓴 어머니가 걸어 나오고 있다.
그때 어머니가 임신하고 있던 아이는 낳은 지 며칠 만에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에 태어난 아이가 누나다.
아버지를 만나기 전 외가는 한지붕 아래 두 집이, 외할아버지 가족과 그 동생의 가족, 살고 있었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결혼을 하며 관훈동에 집을 사서 외갓집 식구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관훈동 집에는 외할아버지와 할머니, 이모가 살았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주로 아버지의 근무지인 포항과 진해에서 살았다고 한다.
나는 관훈동 집에서 태어났는데,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는 순간 아들이 나왔다며 마당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한다. 대을 이어야 하는 장남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없어 받았던 설움을 한꺼번에 날려버린 셈이다. 낡은 사진첩에는 내가 관훈동 집 마당에 서서 찍은 사진이 있다. 이 사진은 내가 한때나마 남들처럼 두 발로 걸어 다니는 건강한 아이였음을 증명해 주는 유일한 사진이다.
나는 2살 반이 되었을 무렵 아버지가 근무하던 목포에서 소아마비에 걸렸다. 아버지가 목포로 전근을 간 것부터 운명적이었다. 아버지는 일선에서 연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연대에서 사고를 친 병사가 처벌이 두려워 월북을 한 것이다. 그리고는 대남 방송에 출연을 하였다. 이를 청취한 군 당국은 그의 신원과 소속 부대를 파악한 후 연대장의 책임을 물어 목포로 좌천을 시켰던 것이다. 아버지가 계속 서울이 멀지 않은 휴전선 부근에서 근무를 했더라면 나는 어머니와 관훈동에 살았을 것이며 목포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낮잠을 자고 일어난 아이가 일어나지 못해 일으켜 세워 주었더니 픽하고 쓰러지더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팔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고 한다. 며칠 동안 목포에서 용하다는 의원을 다 찾아다녀 보았지만 아무도 정확한 병명조차 말해주지 못했고, 그중 한 의사가 서둘러 서울의 큰 병원에 데리고 가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