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군사혁명

by 고동운 Don Ko

장남인 내가 장애인이 되고 나니 부모님은 아들이 하나쯤 더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동생을 낳았는데, 딸이었다. 아기가 통 울지를 않고 하도 순해서 집에서는 ‘은희’라는 이름 대신 ‘이쁜이’라고 불렀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모두 그녀를 이쁜이라고 불렀다. 아들이었으면 하고 낳은 아이가 딸이다 보니 한번 더 하는 마음으로 막내를 낳았는데, 또 딸을 낳았다. 그래서 2남 3녀가 되었다.


대령으로 연대장까지 지낸 아버지는 당연히 별을 달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승승장구 잘 나가고 있었으니까. 그러다가 4.19가 터지고 5.16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가회동 우리 집 마당에서는 서울시가 내려다 보였는데, 4.19가 일어나던 날 이곳저곳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볼 수 있었다. 우리 아랫동네에는 자유당 국회의원이 살고 있었는데 시위대가 그 집까지 몰려들어 소란을 피우는 소리에 혹시 우리 집까지 불똥이 튀는 것은 아닌가 싶어 식구들이 불안에 떨기도 했었다.


5.16 군사혁명은 육군이 주동하여 벌린 혁명이지만 그즈음에 해병대에서도 혁명 이야기가 떠 돌았었다고 한다. 하지만 해병대는 숫자도 적고 해서 주도적으로 혁명을 이끌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도 처음에는 4.19 혁명에 의한 민주당의 새로운 질서 확립에 커다란 희망을 걸고 있었다. 하나 그들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 조국의 현실은 추호의 쇄신 기운도 엿볼 수 없었다. 이에 이르자 정의감에 불타는 영관급 장교들은 이 사태를 좌시만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의 혈기는 불처럼 끓어올랐다. 그들은 구국의 일념으로 혁명 계획에 착수했다. 그리고는 혁명동지를 규합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정훈교육시간에는 혁명의 필요성이 역설되었다.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는 해병대의 혁명 기운은 마침내 김윤근 준장이 지도자로 추대되면서 그의 지휘로 혁명의 열기는 더욱 박차를 더해갔다.


그들은 거사일로 해병대 창설기념일인 4월 15일을 목표로 삼았다. 중견 장교들은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행동 계획서를 작성하여 거사 수일을 앞두고 김윤근 준장을 찾아가 그의 결재를 요청했다. 그때 여단장이던 김윤근 준장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육군의 박정희 장군의 혁명 계획이 현재 추진되고 있다고 전하면서, 우리의 거사도 육군과 합동으로 추진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어왔다. 해병대 혼자만의 외로운 전투보다는 차라리 육군과 함께하면 성공의 확률도 더욱 높으리라. 동지들은 이에 전폭적으로 찬동하였다.


그러한 연유로 해병대의 4.15 혁명 계획은 육군과의 합동작전 수행으로 인하여 영원히 보류가 되어 버린다. 이리하여 해병대는 5.16 혁명의 성공을 위하여 육군과 손을 잡고 혁명 대열의 일익을 엄숙히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516 혁명군 해병대 - 해병 닷컴에서)


해병대가 먼저 혁명을 했더라면 아버지의 운명도 달라졌을 것이다. 그 무렵 아버지는 11 연대장을 끝으로 야전 지휘관에서 물러나 한직을 돌고 있었다. 국방대학원의 교수를 마친 후에는 다시 야전군으로 빠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는데 사령부로 발령을 받았다. 사령관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장군의 꿈이 사라져 가는 것을 느낀 아버지는 어느 날 장전한 권총으로 무장을 하고 해병대 사령관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아버지는 협상카드를 꺼내 들었다. 1년 동안 차량 한 대와 운전병을 지원해 주고 봉급을 지급해 주면 그 후 예편을 하겠다는 조건이었다. 해병대 창설 때부터 한솥밥을 먹어 온 후배인 아버지를 두고 나름 고민을 하고 있던 사령관은 선뜻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버지는 그때 집에 돈이 좀 모여 있어 옷을 벗고 나와도 사업을 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가회동 집 외에 다른 재산은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외할아버지가 돈을 빼돌렸다고 생각하셨다. 그런 생각에는 다분히 근거가 있다. 내 기억에 할아버지는 이렇다 할 직업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가의 골동품과 옛날 돈을 수집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가회동 집을 팔고 익선동으로 집을 줄여 이사를 했다. 외가는 관훈동에 11평짜리 작은 한옥을 사서 분가를 했다. 나는 그때 외가를 따라갔다. 평수는 작아도 문간방까지 방이 세 개나 있었다. 마당에는 한쪽에 반 지하창고가 있고 창고 위에는 장독대가 있었다. 할머니는 늘 가파른 계단으로 장독대에 올라 빨래를 널곤 했다. 안방에서는 부엌을 볼 수 있는 작은 창이 있어 나는 밥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들여다보곤 했다.


마당에는 수돗가와 하수구가 있었다. 그 무렵 집들은 대개 수도가 하나, 하수구도 하나였다. 부엌이나 화장실에는 물이 나오지 않는다. 수돗가에서 물을 받아다 밥을 하고, 씻고, 빨래를 했으며, 밥 먹은 그릇은 수돗가에 가져와 씻었다.


화장실은 변소라고 불렀는데, 바닥에 시멘트를 바른 공간에 대소변을 모았다가 차 오르면 사람을 불러 퍼냈다. 후에는 큰 호스로 진공 펌프질을 해서 빼내었지만 처음에는 깡통을 단 긴 장대로 대소변을 퍼서 물통으로도 쓰던 네모난 양철통에 담아서 날랐다. 변소를 치는 날이면 똥통을 진 사람들이 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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