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아버지의 생각이 바뀐 것인지 아니면 어머니의 설득 때문인지 나를 학교에 보내려는 시도가 몇 번 있었다.
첫 번째 시도는 세브란스 병원 부설 특수학교였다고 기억한다.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모아서 가르치는 특수학교가 있었다. 집을 떠나 시설에서 기숙을 하며 다니는 학교였다. 부모님도 나를 그런 시설에 보내기를 원치 않았던 것 같고, 나도 학교는 가고 싶었지만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한다고 하니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 일은 금세 시들해져 버렸다.
그다음은 구파발로 이사를 해서 동생들이 '선일 국민학교'라는 사립학교에 다닐 무렵의 일이다. 어머니가 동생의 담임을 만나서 내 이야기를 했던 모양이다. 내게 국민학교 졸업장 정도는 받아주려고 했던 것 같다. 학교에서는 나의 입학에 대하여 긍정적인 답을 주었던 모양이다. 부모님은 숙제나 시험지 등을 집에 가져다가 공부를 하기를 기대하셨고, 학교에서는 등교를 요구했기 때문에 입학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때 장애인 특수학교에 가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1990년대 중반, 미국에 이민 온 후 17년 만에 처음 고국을 방문했을 때 S재활원에서 2주 동안 머물렀었다. 장애인 학교가 있어 일부는 시설의 기숙사에 머물며 학교를 다녔고, 통학하는 학생들도 다수가 재학하는 제법 큰 시설의 교육기관이었다.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많은 수의 아이들이 좌절하고 있었다. 본인의 학습능력과 상관없이 단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한데 모아 수업을 하고 학습능력이 떨어지는 학생들 때문에 학습의 질이나 진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경쟁력 있는 수업을 할 수 없어 일반 상급학교로의 진학이 수월치 않다고 한다.
기숙사에 머무는 학생들과 같이 하루 세끼를 그곳에서 먹었는데, 통학하는 학생과 교직원까지 함께 먹는 점심에 비해 아침과 저녁 메뉴가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였다. 넌지시 물어보니 점심은 학교 급식 수준이고 아침저녁은 장애인 시설 기준으로 예산이 나오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가 한국을 떠난 80년대 초부터 한국에서는 장애인 복지가 크게 향상되며 다수의 장애인들이 사회에 진출하였는데, 이런 특수학교 출신들은 전무했던 것으로 안다. 부모의 등에 업혀 일반학교에 다니고 대학 당국과 싸워가며 진학했던 장애인들이 장애계에 진출하였다.
장애인을 시설에 모아 놓는 것은 결코 장애인 복지라고 할 수 없다. 이는 장애인을 사회로부터 격리하고 분리시키고 일이다. 이런 시설에서 자라고 공부한 장애인은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사회적응 훈련을 따로 받아야 한다. 그래도 사회적응을 하지 못하여 이런저런 시설과 학교로만 전전하는 장애인들도 있다.
장애인 복지의 답은 통합교육뿐이다. 어려서부터 장애인과 함께 놀고 공부한 사람들은 장애인도 그들과 다를 것이 없고 능력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함께 공부하고, 일하며, 이웃하여 사는 일에 거부감이 없어진다. 자립하지 못한 장애인은 결국 가족의 걱정이며 사회의 짐이다. 그들은 세금을 축내며 살게 된다. 자립한 장애인은 세금을 내고 사회에 기여하며 살 수 있다. 어떤 사회가 경쟁력 높은 사회인 가는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
미국을 장애인의 천국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장애인에게 공짜로 주어지는 특혜는 별로 없다. 나는 미국에 30여 년 동안 살고 있지만 여느 사람들처럼 일하고 세금 내고 남들과 같은 공과금을 내며 산다. 학교 조차 다닐 수 없었던 한국과 달리 미국에 와서 남들과 경쟁할 수 있는 동등한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미국에 와서 대학을 다니며 학업에 대한 한을 풀었지만 잃어버린 학창 시절은 찾지 못했다.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친구가 없다는 것은 어떤 장애보다도 더 큰 핸디캡이다. 내게는 그런 친구들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