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예편을 하며 어머니와 함께 사업을 해야 했기 때문에 나를 외가로 보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후에 들은 아버지의 설명을 조금 달랐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가겠다고 고집을 피웠으며 그 이유는 큰 딸네와 연이 끊어질까 봐 그랬다는 것이다. 두 분이 모두 돌아가셨으니 이제 와서 확인할 길은 없다. 난 그 후 집과 외가를 오가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집에 얼마간 있다가 이사를 가야 하거나 하면 외가로 보내져 몇 달씩 있곤 했다.
아버지는 예편을 하며 연금 대신에 퇴직금으로 일시불을 받았다. 어머니는 그 일을 두고 평생 아쉬워하셨다. 얼마 안 되는 돈이었다고 한다. 연금은 계속 인상이 되어 아버지가 돌아가실 무렵 같이 대령으로 퇴역한 친구분은 매달 300만 원가량의 연금을 받고 있었다. 그분은 미국에 이민을 온 후에도 계속 매달 연금을 받았다.
아버지가 처음 시작한 사업은 시장판 사람들을 상대로 돈을 빌려주는 서민금고였다. 그 무렵 시장 상인들은 목돈을 빌려 쓰고 매일 일수를 찍었다. 빌린 돈을 30-60일로 나누고 이자를 더 해서 매일 갚는 방식이다. 시장을 돌며 수금을 해야 하니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끌어들인 사람이 밀선을 타고 함께 월남했던 아버지의 외사촌과 외 5촌 아저씨였다.
사업은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돈 없는 사람들이 돈을 빌리다 보니 제때 갚지 못해 며칠씩 밀리고, 때로는 소문도 없이 잠적해 버렸다. 가끔은 돈 대신 전축이나 시계 따위를 받아 오기도 했다. 고객 중에는 윤락여성들도 있었는데, 수금을 나간 외사촌과 아저씨가 일수금 대신 몸으로 전표를 찍고 오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 사업은 얼마 못 가서 문을 닫고 말았다. 다음에 시작한 것이 부동산이다. 익선동에 집을 사서 고쳐 팔았다. 그 집을 팔아 조금 재미를 보았던 모양이다.
익선동 집에 사는 동안 이모는 재혼을 했다. 아버지의 해병대 시절 전령으로 근무했던 ‘병현이’ 아저씨와 결혼을 한 것이다. 집에서 전통 혼례를 올렸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 고 그날 부모님도 빌린 한복을 입고 한번 더 결혼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모는 다양한 남성 편력을 지녔다. 병현이 아저씨와 재혼을 하기 전에 사귀는 남자가 있었다. ‘박사장'이라고 불리는 남자였다. 미군부대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나 싶다. 태능의 사격장에 드나들어 이모가 내게 이미 쏘아 속이 빈 엽총 총알을 얻어다 주기도 했었다. 할머니를 모시고 용산 미군부대 안의 식당에 다녀온 적도 있고, 내게 체스판을 선물하기도 했었다.
박사장이 할머니만 모시고 미군부대에 있는 식당에 가겠다고 하자, 이모는 걱정이 많아졌다. 한 번도 양식당에 가본 적이 없는 할머니가 과연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해서다. 만족한 얼굴로 돌아온 할머니에게 식사는 어떻게 했느냐고 물었더니, 할머니는 박사장이 하는 데로 따라 했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그런 분이셨다.
그는 유부남이었던 것 같다. 이모가 재혼을 하며 그들의 뜨거운 연애는 끝이 났다.
병현이 아저씨는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그를 이모부라고 부르지 않았다) 군산항에서 근무하는 세관원이었다. 유니폼을 입고 사무실에 근무하는 세관원이 아니라 밀수를 잡아내는 수사관이었다. 60년대 한국에는 물자가 많이 부족했다. 기호식품과 사치품, 가전제품의 밀수가 빈번하던 시절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쉽게 구할 수 없는 것에 욕심을 낸다. 미국에 사는 한국 동포들도 비슷하다. 한국에서는 미제만 찾던 사람들이 미국에 살면서는 한국 것을 갖고 싶어 하고 탐낸다.
이모의 두 번째 결혼생활도 순탄치는 않았던 것 같다. 몇 달에 한 번씩 늦은 밤 창가에 와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이모가 기차를 타고 올라온 것이다. 이렇게 올라 온 이모는 할아버지의 꾸중을 듣고 할머니가 집어주는 얼마간의 용돈을 받아 돌아가곤 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헤어지고 말았다. 둘 사이에 아이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혼인신고도 안 하고 살았기 때문에 헤어지는 일은 수월했던 모양이다. 놀랍게도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그와 다시 재회를 하게 되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자.
이모의 다음 남자는 '문 서방'이라는 월남에서 온 대머리 아저씨였다. 그는 외가의 문간방에서 잠시 이모와 함께 살았다. 그는 할머니가 만들어 주는 아침밥을 먹고는 이모와 외출을 해서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는데, 항상 간식거리를 사들고 들어왔다. 어떤 날은 호떡, 다음날은 찐빵, 과일과 아이스크림 등 다양한 먹거리를 들고 왔다. 나중에는 나뿐 아니라 할아버지도 그의 귀가를 은근히 기다리는 눈치였다. 알고 보니 할아버지에게서 빌려 간 돈으로 사 온 간식이었다.
그는 사업이 자리를 잡으면 이모를 데리러 오마고 약속을 하고 월남으로 떠났다. 이모는 '문 서방'에게 쓰는 연애편지의 서문을 내게 만들어 달라고 했다. 나는 책에서 본 구절을 흉내 내어 그럴듯한 문장을 만들곤 했다. 카세트테이프에 음성 편지를 만들어 보내며 이모는 은희의 '꽃반지 끼고'를 부르기도 했다. 나는 옆에서 후렴을 넣어 주었다. 문 서방은 돌아오지 않았으며, 이모를 데리고 가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부동산에서 돈을 좀 벌자 구파발에 집을 지어 이사를 갔다. 처음에는 전기도 없었는데 이사를 가고 얼마 후에 전기가 들어왔다. 그 후 구파발에는 기자촌이 들어서며 급속히 발전했다.
만약 그때 구파발로 가지 않고 아버지의 외사촌 여동생의 말을 듣고 강남 말죽거리로 자리를 잡았더라면 우리 집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우리가 ‘고모’라고 부르는 아버지의 외사촌은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강남으로 자리를 잡아 어머어마한 부를 키웠다.
그때 강남으로 가지 못한 데는 어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사대문 안을 고집하던 어머니에게는 서울이 지척인 구파발이 조금 덜 거부감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이북이 가까이 있다는 지리적 여건이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인 점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