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A). 아들 없는 여인

by 고동운 Don Ko

외할아버지는 골동품과 화폐를 수집하며 부자들에게 골동품이나 옛날 돈과 은화, 금화 등을 팔기도 했다. 이 무렵 종로는 서울의 중심지라서 돈 좀 있는 이들이 모여 있었다. 이들을 모아 친목회를 운영하셨는데, 백만 원가량의 가입회비가 있었다. 그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 정기적으로 회식도 하고 철마다 야유회나 여행을 가는 방식이었다. 할아버지는 친목회에서 받는 이자보다 조금 더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고 차액을 챙기는 방법으로 돈을 벌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늘 냉수에 빨랫비누로 세수를 하였고, 집에 들어오면 작은 수건으로 옷을 깨끗이 털어서 걸어 놓았다. 내가 기억하는 한 할아버지는 집에서 면도를 한 적이 없다. 매주 이발소에 가서 면도를 하고 왔다. 그 무렵 이발소에는 아가씨들이 있어 면도뿐만 아니라 귀도 파주고 마사지도 해 주었다. 가회동에 살 때 맹장수술을 했는데, 상처가 제대로 아물지 않아 맹장을 떼어 낸 오른쪽 아랫배에 작은 탈장이 생겼다. 수술을 하면 된다는데, 두 번 다시 수술대에 오르기 싫다며 고집을 부려 남은 생을 탈장 상태로 살았다. 가래를 뱉거나 기침을 할 때면 꼭 배를 잡고 해야만 했다.


장과 쌀, 그리고 땔감을 들여놓는 것으로 가장의 의무를 다 했다고 생각하는 분이었다. 가을이면 겨우내 쓸 연탄과 일 년 치 쌀을 사 들였다. 겨울이 지나고 날이 따스해지면 쌀에서 벌레가 나왔다. 바구미라는 벌레와 나방이 생겼다. 벌레 먹은 쌀은 잘 부서지고 밥을 해도 윤기가 없으며 맛이 없다. 그 동네에는 그날 벌어 저녁이면 봉지쌀을 사들고 집에 가는 이웃들도 있었다. 우리는 벌레 난 묵은쌀로 만든 밥을 먹고, 그 사람들은 새로 도정한 쌀로 지은 밥을 먹었다.


할아버지는 돼지 삼겹살, 설탕, 그리고 흰밥을 좋아하셨다. 외가에서 유일하게 먹는 잡곡밥은 맷돌로 거칠게 갈아 쪼갠 팥을 넣은 밥이었다. 그런 식습관 때문인지 말년에 중풍에 걸려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다.


외할머니는 학교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는 문맹이었다. 하지만 기억력이 좋아 고사성어와 속담도 잘 쓰셨고 셈이 밝아 돈 계산도 빨랐다. 그 시절 대부분의 여인네들이 그러했듯이 남편인 할아버지를 매우 극진하게 대했다. 생선 반찬을 만들면 할아버지 곁에서 가시를 모두 발라 살만 놓아드렸고, 본인은 대가리만 드셨다.


눈썰미가 좋아 무엇이나 잘 고치고 만들었다. 할아버지의 잠옷은 할머니가 만들었다. 파는 잠옷의 본을 종이에 그린 후 천을 재단해서 만들었다. 할아버지 몰래 이웃집 여자의 한복을 만들어 주고 용돈을 받았을 정도다.


할머니에게는 '복순'이라는 본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아지'라는 이름의 주민등록증을 사용했다. 예전에는 영아의 사망률이 높아 아이가 1-2살이 된 후에 호적을 올리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면사무소에 가는 사람에게 부탁을 했는데, 막상 면에 가서는 이름을 잊어버려 '박아지'로 올렸다는 것이다.


할머니에게는 오라버니가 한 분 있었는데, 우리를 그를 '시골 할아버지, ' 또는 '합죽이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사니 시골 할아버지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가 몽땅 빠져 합죽이 할아버지다. 밥도 "오물오물, " 떡도 "오물오물, " 그리고 갈비까지, 못 잡숫는 것이 없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것을 합죽이 할아버지를 통해 알게 되었다.


가끔 서울의 동생에게 잘 말린 박을 잘라 만든 바가지나, 싸리를 엮어 만든 싸리비 등도 가져다주고, 언젠가는 토종닭도 주어 닭볶음을 해 먹었던 기억이 있다. 처남과 매부는 동갑이었는데 할아버지는 시골에 사는 처남을 다소 업신여겼던 것 같다.


시골 할아버지에게도 나름 자랑거리가 있었는데 서울의 대학에 다니던 둘째 아들이었다. 소를 팔아 학비를 대며 큰 기대를 했던 것 같은데, 아버지의 기대만큼 성공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 무렵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정 반대 데모가 극심했는데, 어느 날 근처에서 데모를 하다 쫓겨 외가로 반나절 피신을 왔던 적이 있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유일한 모습이다.


할머니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계모 손에 자랐다. 할머니에게는 딸인 우리 어머니와 별로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동생이 둘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젊은 할머니, 젊은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할머니의 아킬레스건은 글을 모르고 아들이 없다는 것이었다. 할머니의 작은 동서는 글도 알고 아들도 둘이나 낳았다. 그래서 할머니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할머니도 아들을 낳기는 했던 모양이다. 낳은 후 곧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누군가 아들 이야기를 하면 할머니는 본인도 아들을 낳았었다는 사실을 꼭 밝히곤 했다.


할머니 세대의 남편들은 아내가 아들을 낳지 못하면 공공연히 밖에서 아들을 낳아 들여오기도 했는데, 할아버지는 그런 일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할머니는 늘 그 점을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런 할아버지도 훗날 젊은 여자와 바람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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