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by 고동운 Don Ko

80년대 이민을 온 이민 1세나 1.5세들은 봉급생활보다는 자영업을 선호했다. 언어의 문제보다는 속전속결로 빨리 돈을 벌자는 생각이 더 컸다. 열심히 해서 크게 성공한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그 숫자는 적다. 대부분의 영세업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휴일도 없이 일을 해야 한다. 병가나 휴가, 건강보험이나 노후대책 등도 없다. 10-20년이 지나도 한국에 한 번 다녀오기가 힘들다.


미국의 영향권에 있던 동남아 이민자들은 자영업보다는 직장생활을 선호한다. 두 부부가 직장생활을 하면 영세사업자보다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다. 휴일에 놀 수 있고, 휴가를 얻어 고국에 다녀오기도 한다. 공무원 중에는 필리핀 이민자들이 많다.


30년 동안 산재기금에서 일을 하며 한국인 직원을 접한 것은 손에 꼽을 정도다. 90년대 이후 이민 2세들이 사회에 진출을 하며 직장생활을 하는 한인들의 수가 급속히 늘어났다. 이제는 관공서나 학교 등에서도 한인 직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내가 ‘병 아주머니’를 만난 것은 80년대 중반 LA 지역사무소에서의 일이다. ‘병 아주머니’의 이름은 영어로 쓰면 ‘Byong Hee Chung’인데, 미국인들이 보기에 이름은 ‘Byong’이고, 가운데 있는 ‘Hee’는 ‘middle name’ 이 된다. 다들 ‘병’이라고 불러, 자연히 ‘병 아주머니’가 되었다. 회사에서 처음 만난 한국인 직원이었기 때문에 가까이 지내다가 내가 우드랜드 힐스로 옮겨가며 한동안 연락이 없이 지냈다. 2년 후 다시 LA로 돌아와 같은 부서에서 일을 하며 가까워졌다.


‘병 아주머니’와의 인연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데는 나름 사연이 있다. 내가 을지로의 ‘메디컬 센터’에서 물리치료를 받던 무렵에 ‘병 아주머니’는 그 병원의 병리 실험실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언젠가 보조기를 입고도 걸을 수 없는 나를 두고 등을 돌려 울던 아버지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이를 읽은 ‘병 아주머니’가 그날의 기억을 떠 올렸다. 아버지를 보았다는 것이었다.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는데, 군복을 입은 남자가 우는듯한 표정으로 유리문을 통해 복도를 바라보고 있던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라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병 아주머니’ 와는 때로는 누이나 어머니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지냈다. 혼자 지내던 나는 아침을 잘 챙겨 먹지 못했는데, 이를 안 ‘병 아주머니’가 늘 빵이나 떡을 가져와 내 책상에 두고 갔다. 가끔은 점심시간에 일본 타운에 가서 라면을 먹기도 하고, ‘맥도널드’에 가기도 했다. 햄버거와 커피를 사서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먹으면서 ‘병 아주머니’는 어디 놀러 가는 것 같다며 즐거워했다.


아직도 ‘병 아주머니’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어김없이 카드와 선물을 보내온다. 금년에도 선물이 왔다.


병 아주머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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