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마이카 시대

by 고동운 Don Ko

구파발에서 닭도 키우고 벌도 키우던 아버지는 양계장에 올인하기로 결심을 했던 모양이다. 구파발 집을 팔고 통일로 변의 벽제에 땅을 사서 집을 짓고 길 건너에는 양계장을 지어 본격적인 양계업을 하게 되었다. 그 무렵 벽제는 주변이 모두 농사를 짓는 논과 밭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 군부대가 있어 아침저녁으로는 군가가 울려 퍼져다. 60-70년대 한국은 안보가 최우선 하던 시절이다. 통일로에는 유사시 이를 폭파하여 남하하는 인민군 탱크를 저지하기 위한 콘크리트 터널이 곳곳에 있었다. 밤이면 이동하는 군부대 차량이나 탱크 소리도 자주 들렸다. 시도 때도 없이 무장공비가 내려오기도 했다.


전쟁의 비참함을 잘 아는 아버지는 그 무렵 미국행을 결심했던 것 같다. 아버지가 내세우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1) 한국에서는 내가 사람답게 살 수 없다는 것이었고, (2) 남동생이 군대에 가서 혹시라도 무슨 일을 당할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고 한다.


벽제에 사는 동안 시골에 살며 서울 학교에 다니는 누이와 동생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대규모 양계장을 운영하는 일은 수월치 않았다. 혹시라도 병이 생길까 늘 노심초사하며 근처에 병이 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밤을 새워 방역을 해야 했다. 늘 오르락내리락하는 달걀값과 닭고기값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살았다.


70년대에 들어서며 한국에 ‘마이카’ 시대가 도래하여 돈 있는 사람들이 서울 외곽으로 드라이브를 나오는 숫자가 늘어갔다. 우리 집에서 조금 더 안쪽으로 ‘늘봄농원’이라는 곳이 생겨 제법 재미를 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시험 삼아 건물을 지어 휴게소라는 이름을 걸고 주말에 다과를 팔았다. 제과점의 과자와 빵을 사다가 커피, 차 등과 함께 팔다가 얼마 후에는 닭죽도 만들어 팔았다. 가능성을 본 아버지는 그곳에 ‘벽제갈비’를 창업하고 양계장의 문을 닫았다.


우리가 살던 안채를 영업하는 방으로 내놓고, 우리는 축사처럼 한 줄로 방 3개와 화장실이 있는 아래채를 새로 지어 이사를 했다.


아버지는 그때 벽제갈비를 하며 손님이 원하면 방에서 하루 저녁 묵고 갈 수 있는, 요즘 말하는 펜션 스타일의 영업도 생각하고 있었다. 손님 중에 더러 숙박을 원하는 손님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 일은 어머니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무렵 자가용을 몰고 오는 손님 중에는 불륜으로 보이는 커플들도 많았다. 대개는 그런 이들이 방에서 묵고 가고 싶어 했다. 어머니는 자식을 키우는 사람이 그런 장사는 할 수 없다며 반대를 했다.


만약 그때 아버지가 펜션 스타일의 영업을 했더라면 장사는 훨씬 더 잘 됐을 것이다. 근처의 땅을 더 사서 큰 규모의 펜션 하우스들이 들어섰을 것이다.


벽제갈비는 넓은 터에 잔디밭과 나무들로 잘 가꾸어 놓아 TV 방송에도 여러 차례 나왔다. 가수들이 잔디밭을 걷거나 나무 주변을 맴돌며 노래를 하는 모습이 뮤직비디오에 자주 등장했었다.


아버지의 외사촌과 5촌 아저씨들이 가끔 놀러 왔는데, 시중의 소문들을 물고 왔다. 박정희 대통령이 여자를 좋아해서 여자 연예인들이 무수히 불려 간다거나, 피살당한 정인숙 여인도 실은 박정희의 여자인데 정일권 총리가 뒤집어쓴다는 등의 소문들을 물고 왔다.


벽제갈비를 하는 동안 ‘김대중’ 후보가 다녀 간 적이 있다. 아버지 말에 의하면 그 후 중앙정보부에서 수차례 찾아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캐묻고 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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