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원어민과 영어로 말하다

by 고동운 Don Ko

어느 날 우리 집에 미군 장교가 왔다. 아버지가 그와 몇 마디 말을 주고받았는데,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나마 영어를 좀 공부한 내가 그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는 집 근처 삼송리에 있는 미군 미사일 부대의 부 중대장이었다. 곧 아내와 세 아이가 함께 살기 위해 한국에 오게 되는데, 근처에서 들어 가 살만한 집을 찾다가 제일 크고 깨끗하게 보이는 우리 집을 찾아온 것이다.


그때 우리는 안채를 갈빗집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큼지막한 방 셋과 수세식 화장실이 있는 아랫채를 지어 쓰고 있었다. 그 방 중의 하나를 그에게 세를 주기로 했다.


‘렉스’라는 이름의 미군 중위는 유타주 출신으로 학비를 면제받기 위해 ROTC 에 지원하여 대학을 졸업한 후 의무복무 기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에게는 ‘바바라’라는 아내와 ‘브루스,’ ‘마이클,’ 그리고 ‘에버린,’ 2남 1녀의 자녀가 있었다.


며칠 후 다섯 식구가 이사를 들어와 우리들과 함께 아랫채에서 살게 되었다. 나는 가끔 바바라가 외출을 할 때 아이들을 보아주기도 했고, 누나는 그녀의 요리를 도와주며 ‘프렌치프라이’를 얻어먹기도 했다. 우리가 아이스크림을 주면 그녀는 그램 크래커를 꺼내 와 함께 먹기도 했다.


그때 우리 집에서는 칠면조를 키우고 있었는데, 추수감사절에 바바라가 칠면조를 구워 두 집 식구들이 함께 밥을 먹기도 했다. 그녀는 서양요리를 할 때면 누이와 내게 조리법을 설명해 주기도 하고 이런저런 준비를 시키기도 했다. 잘게 부순 식빵과 건포도로 배를 채운 칠면조를 그녀가 빌려 온 오븐에 구워 우리 집에서 준비한 한국음식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후에 미국에 온 후,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알게 되며 그때 우리가 함께 했던 추수감사절 만찬이 그 가족에게는 참으로 특별한 날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설고 낯선 이국 땅에서 원주민인 한국인 가족과 칠면조를 구워 먹었으니 말이다.


바바라는 자녀들이 낮잠을 자는 시간에 내게 영어도 가르쳐 주고 게임도 놀아 주었다. ‘얏지,’ ‘스크래블,’ ‘배틀쉽’ 같은 게임도 그녀를 통해 알게 되었다.


미군 가족은 PX에서 한 살림을 살 수 있었다. 냉장고, TV 등의 가전제품을 살 수 있었는데, 바바라에게는 그런 것을 살만할 돈이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잘 구워삶아 그녀가 살 수 있는 물건들을 우리에게 사 달라고 부탁을 했다. 마음 착한 바바라는 쾌히 그러마고 했고, 함께 PX에 가기로 약속까지 했는데, 며칠 후 취소를 했다. 남편인 렉스가 안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얼마 후에는 렉스가 소개를 해서 다른 미군 부부가 한 쌍 더 들어와 살게 되었다. 부인의 이름은 ‘테리’ 였는데, 남편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얼마 후 바바라네는 의정부 쪽으로 이사를 갔다. 미국에 오던 해 겨울, 유타에 있는 이모네로 놀러 가는 교우를 따라가서 바바라 가족을 만났다. 그때도 그녀가 구운 칠면조를 먹었다.


나는 테리에게서 본격적으로 영어를 배웠다. 주 5일, 매일 30분씩 함께 영어책을 읽었다. 교습비 대신 그녀는 우리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녀는 거의 모든 한식을 잘 먹었고, 연탄에 구운 도루묵도 가운데 큰 가시만 빼고 통째로 잘 먹었다.


그녀는 몸에 얼룩 무니가 있는 고양이를 한 마리 얻어 키우게 되었다. 그걸 한국말로 뭐라고 하느냐고 내게 물어 ‘얼룩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 주었고 후에 미국으로 귀국할 때 데리고 갔다.


그녀에게서 배운 영어 덕에 나는 원어민에 가까운 발음으로 영어를 할 수 있게 되었고, 미국에 이민 온 후 언어문제로 고생하는 일은 없었다.


요즘은 한국에 원어민 강사도 많고 시청각 교재도 많아 한국사람들도 발음에 큰 문제없이 영어를 한다. 하지만 30-40년 전 한국에서는 문법과 독해 위주의 영어공부를 했기 때문에 발음과 문장의 고저장단에 익숙지 않았다. 영문과를 졸업한 사람도 미국에 오면 영어가 잘 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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