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상달 고사떡

by 고동운 Don Ko

60년대 한국은 모든 물자가 부족하던 시절이다. 일본이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의 도움을 받아 산업기반을 구축하고 크게 발전한 반면 한국은 아직도 후진국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미국은 잉여물자나 구호 물자라는 명목으로 한국에 많은 원조를 해 주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미국에서 원조받은 옥수수 가루로 만든 빵과 분유를 물에 타서 만든 우유를 주었다. 고아원 등의 시설에 나누어 주라고 옷가지며 식료품, 장난감 등을 보내왔다. 어려운 이들에게 이런 물건들은 시장에 나돌았고, 돈 있는 집 사람들의 차지가 되었다.


동대문 시장에는 이런 미제 물건을 (가짜를 포함) 파는 가게들이 70년대 초반까지 성업을 하고 있었고, 보따리장수 아주머니들은 이런 물건들을 머리에 이고 이집저집으로 팔러 다녔다.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한국인들이나 또는 양색시들을 통해서도 미제 물건들이 많이 시중으로 흘러들었다. 구파발로 이사를 한 후, 우리 집에도 이런 미제 물건 장수가 드나들었다.


사탕이나 껌, 파인애플 통조림, 잼, 땅콩버터, ‘탱’ 주스 가루, 햄, 소시지 등의 가공육, 치즈, 마요네즈, 케첩, 등의 먹거리가 우리 집에도 등장했다. 그 무렵에는 명절이 되면 아이들에게 옷이나 신발을 사주었는데, 가끔은 미제 옷을 선물 받기도 했다.


외할아버지도 미제 챰스 (Charms) 캔디와 땅콩이 든 초콜릿 등을 사 왔다. 저녁 먹고 입이 심심하면 내 입에 하나, 할머니 입에 하나 씩, 캔디를 넣어 주었다. 땅콩이 든 초콜릿은 아끼며 건넌방 장 안에 넣어 두었는데, 여름이 되자 이상한 모양의 벌레들이 집안에 날아다녔다. 며칠 후 벌레들이 초콜릿 상자에서 나온다는 것이 밝혀졌다.


지금 같으면 당장에 상자째 쓰레기 통에 버렸을 것이다. 캔디가 귀하던 시절이다. 할머니는 캔디를 소쿠리에 펼쳐 처마 밑에 매달아 놓았다. 며칠 후 벌레들이 사라졌다 싶자, 하나둘씩 반으로 잘라 툭툭 털어내고 먹었다.


음력 10월을 상달이라고 했다. 상달이 되면 이 집 저 집에서 고사를 지냈다. 교회에 나간다는 집에서도 고사를 지낼 정도로 너나 할 것 없이 고사를 지냈다. 시루 바닥에 있는 둥근 구멍들을 무나 감자를 썰어 막고 삶은 붉은팥과 쌀가루를 한켜씩 쌓아 시루떡을 쪘다. 쌀가루는 멧떡이 되고, 찹쌀가루는 찹쌀떡이 된다. 집에 따라서는 여기에 단호박이나 무 말린 것을 넣기도 했다.


이사를 했거나 가게를 새로 열거나 하는 특별한 고사에는 돼지머리와 과일 등이 등장하지만 가족의 건강과 평안을 비는 상달 고사에는 떡과 북어 정도가 올라갔다.


10월이 되면 하루 건너 이웃집에서 떡을 가져왔다. 할머니는 이런 떡을 소쿠리에 넣어 말려 놓았다가, 11월까지 출출한 밤에 조금씩 쪄서 밤참으로 내놓았다.


밤이 긴 겨울이 되면 메밀묵과 찹쌀떡 장수가 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메밀묵 사~려, 찹쌀~떡” 하며 외치고 다녔다. 통금이 있던 시절이며, 도둑을 쫓기 위하여 야경꾼들이 순찰을 돌았다. 야경꾼들은 양손에 커다란 나무 조각을 하나씩 들고 마주쳐서 “따~악” 소리를 내며 다녔다.


연탄 온돌방은 아랫목은 설설 끓어 장판이 누렇게 탈 정도지만 윗목까지는 열기가 가지 않았다. 나무 격자 문에 창호지를 발라 만든 문에는 틈이 많아 겨울에는 웃풍이 찼다. 밤에 자려고 이불을 덮고 누우면 몸은 따스해도 콧등이 시릴 정도였다.


겨울이 되면 할머니는 수도가 어는 것을 막기 위해 밤이면 물이 졸졸 흐르게 틀어 놓았다. 아침이면 할머니가 새벽에 올려놓은 더운물로 세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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