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지식은 학교에서 체계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고 모두 책을 통해 얻은 것이라 단편적인 면이 많았다. 신문과 잡지를 꾸준히 보았기 때문에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상식에는 밝았지만, 역사 같은 과목은 연대별로 잘 알지 못했다. 조선시대 왕들의 순서인 “태-정-태-세-문-단-세” 같은 것도 알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남에게 내세울 학력이 없다는 것이 큰 약점이며 고민거리였다.
그 무렵 아버지는 미국 이민을 계획하고 있었다. 70년대 한국에는 이민병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 병에 걸리면 돈도 명예도 다 던져 버리고 결국 미국 가는 보따리를 싸곤 했다. 아버지가 이 병에 걸린 것이다. 벽제갈비가 자리를 잡아 제법 돈을 잘 벌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계속 장사를 하고 자식들만 미국에 보냈더라면 훨씬 유복하고 편안한 노년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아버지는 가게와 땅을 모두 처분하고, 70년대 말에 고생이 기다리고 있는 이민 길에 올랐다. 유유상종이라고 했던가. 비슷한 무렵에 아버지의 친척과 친구 중에도 이민을 간 이들이 있었다.
우리 가족의 이민을 돕기 위해 삼촌이 몇 차례 한국을 다녀갔다. 아버지는 기회가 될 때마다 미국을 방문하는 지인들을 통해 삼촌에게 돈을 보냈다. 달러가 귀하던 시절이라 함부로 외국으로 돈을 빼돌리다가 발각이 되면 처벌을 받았다. 미국으로 살러가는 사람들 중에는 독재정권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정부가 전화 감청을 한다고 했다. 아버지는 삼촌에게 돈을 보내며 전화를 해서 암호로 액수를 알려 주었다. 북어를 6마리 보낸다거나 인삼 4 뿌리를 보낸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민을 앞두고는 아버지가 현지답사차 미국에 다녀왔다. 갈빗집을 하고 있던 때라 사장님이 미국에 다녀오시니 모두들 선물을 기대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아버지는 선물을 제대로 챙겨 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남대문의 도깨비 시장에 가서 이런저런 물건을 사다가 나누어 주었다.
한인들의 미국 이민의 원조는 100여 년 전 하와이지만 본격적인 이민은 70/80 년대에 가장 많이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유학생들이, 그다음에는 박정희 독재를 피해서 지식인들이 왔고, 이미 고향을 떠난 적이 있는 실향민들과 화교들, 미군과 결혼한 이들의 가족 (이들은 주로 군 기지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등이 왔다. 그리고 먼저 자리 잡은 가족의 초청으로 부모 형제들의 이민이 이어졌다.
초기 이민사회의 특징은 고국에서의 신분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먼저 기반을 잡은 사람들이 큰소리치는 구조였다. 한국에서 어렵게 살던 사람들일수록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겁 없이 뛰어들었기 때문에 돈도 많이 벌고 자리도 빨리 잡았다. 한국에서의 신분을 내세우고 체면을 생각하는 사람들일수록 힘들게 살았다.
그 무렵 한국이 상대적으로 어렵던 시절이라, 사람들은 미국에서의 고생을 크게 힘들어하지 않았다. 흑인 지역에 들어가 총을 차고 리커스토어나 옷가게를 하던 초기 이민자들은 대부분 큰 재산을 모았다. 도리어 90년대 이후에 한국에서 돈을 좀 가지고 온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었다. 번듯한 가게를 비싼 돈에 사고 보니 매상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잘되는 가게는 매물로 잘 나오지 않는다. 시장에 나오는 대부분의 사업체들은 팔기 위하여 적당히 포장을 해서 내놓은 것들이다. 한인타운에 나가보면 늘 가게 이름이 바뀌곤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주인이 바뀐 것이다.
요즘은 30-40대에 이른 한인 2세들 때문에 (미국에서 태어난 그들만의 정서가 있다) 분위기가 좀 달라지고 있긴 했지만, 한인사회의 정서는 80년대 한국과 비슷하다. 이민자들은 고국을 떠날 때의 정서를 간직하고 산다. 70년대에 이민 온 사람은 70년대의 가치관과 정서로 살고, 90년대에 이민 온 사람은 90년대의 분위기로 산다.
이민은 가고 싶다고 금방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저런 절차와 수속을 거쳐야 하며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었다.
나는 이루어 놓은 것은 없이 나이만 먹어간다는 사실에 초조해하고 있었다. 풀브라이트 장학재단을 통해 미국에 유학을 가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루는 무작정 풀브라이트 장학재단으로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은 미국인 카운슬러에게 내 사정을 설명했다.
나는 소아마비 장애인인데, 한국에서는 학교에 갈 수도 없고 공부를 계속할 수 없어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했다. ‘그리어’ (Greer)라는 이름의 미국 여성이었는데, 자기 사무실로 한 번 나오라는 것이었다. 며칠 후 그녀를 찾아갔다. 내 사정과 상황을 전해 들은 그녀는 일단 고등학교 졸업자격이 있어야 미국 유학을 갈 수 있다며 용산에 있는 미 8군 교육센터를 소개해 주었다.
그곳에서 고등학교 졸업자격시험을 (GED) 신청하고 책을 빌려 시험 준비를 했다. 책을 영내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몇 차례 차를 타고 미 8군 영내의 교육센터가 가서 공부를 해야 했다. 나를 도와 동생이 함께 다녔다. 도시락을 싸 가지고 가서 먹었는데, 센터에 근무하던 한국 직원이 커피를 주어 처음으로 원두커피를 먹어 보았다. 휴게실에는 꼭지가 달린 커다란 커피 통이 있어 맛있는 향의 뜨거운 커피를 따라 마실 수 있었다.
그 무렵 정부 고관의 자녀 중 더러 미군들에게 제공되는 대학 클래스를 듣는 한국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일하던 한인 직원들은 우리가 힘 좀 쓰는 정부 관료의 자녀로 알았다고 한다.
시험은 영어와 수학, 과학, 사회 등 4과목이었는데, 아무래도 수학이 힘들어 보였다. 결국 몇 달 동안 아르바이트 대학생에게서 수학 지도를 받았다. 얼마 후 시험에 합격했는데, 그 성적이면 미 8군에 나와있는 대학 분교에 입학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비싼 학비, 그리고 벽제에서 일주일에 몇 번씩 나를 용산까지 데려다 줄 상황이 아니라 대학 입학은 하지 못했다.
미국 고등학교 졸업자격을 얻은 일은 나의 자존심과 자긍심에 큰 힘을 보태주었고, 후에 미국에 이민을 온 후 어려움 없이 2년제 대학에 입학하는 디딤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