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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동운 Don Ko May 16. 2024

아크릴화 I (5)

2024년 봄 학기

2주에 걸쳐 교수가 가르쳐준 다양한 아크릴 기법을 사용하여 표현주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 과제였다. 주제는 따로 없고, 다른 화가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그리면 된다.

나는 지난 학기 수채화 시간에 ‘오병이어’를 주제로 한 그림을 그려 교수에게서 크게 칭찬을 받았었다. 외국인들에게는 낯선 한글이나 한자가 들어가면 추상화 같은 느낌을 주는 모양이다. 같은 주제로 아크릴화를 그려보기로 했다.

막상 다 그려놓고 보니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수채화의 경우는 종이에 물감을 넉넉히 올리고 물을 부어 흘리는 것만으로도 멋진 배경이 만들어지는데, 아크릴화는 물감을 선택해 붓으로 찍어 일일이 칠하며 캔버스를 채워야 한다.

우선 배경에 너무 강한 색을 깔았고, 캔버스가 커 남은 공간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화요일, 수업에 가니, 캔버스를 어느 정도 채워 온 학생은 몇 안되고 대부분은 그날 그림을 시작하고 있었다. 교수에게 그림을 보여주니 탐탁지 않은 표정이다. 몇 가지 조언을 듣고 수정을 시작했는데,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시작한 일, 끝은 보아야 하니 억지로 대충 테두리 부분을 수정했는데, 아직도 캔버스는 빈 느낌이다. 30분 일찍 슬그머니 교실을 나왔다.

수요일은 줌으로 교수 면담이 가능하다. 아침에 교수를 만났다. 먼저 어제 아무 말 없이 일찍 나온 것을 사과했다. 나가는 것을 보았다며 별일 없느냐고 묻는다. 그림이 마음먹은 대로 안되고, 상대적으로 다른 학생들이 쓱쓱 싹싹 멋진 그림을 만들어가는 것은 보니 실망과 좌절감이 생겨 나왔노라고 사실대로 말해 주었다.

새로운 디자인으로 다시 그려보려고 하는데 색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니, 그림을 시작하기 전에 팔레트를 만들어 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줌 화면에 색상환 (color wheel)을 올려 어울리는 색에 대한 설명을 해 주었다.

면담을 끝내고 그림을 시작했다. 새로운 기분으로, 그림의 디자인도 새로 하고, 교수의 조언대로 색상을 미리 정해 물감을 칠하니 훨씬 좋아 보인다. 첫날은 제법 마음에 들게 그려졌는데, 이틀 후, 나머지 부분을 그리며 다소 실망스러워졌다. b-r-e-a-d 위에 얹은 "오 병"이 마음에 들지 않고, 마지막에 넣은 작은 땡땡이 무니 중 일부가 너무 진하게 니와 버렸다. 고치려고 해 보았지만, 점점 더 이상해지는 것 같아, 중단. 여기까지다.

화요일 수업에 가니, 역시나 모두들 잘 그려왔다. 똑 튀는 아이디어도 많았고, 과감한 시도도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내 그림은 과제물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색상도 무리가 없고 배운 기법을 모두 사용했지만, 주제가 창의성이 부족하고 신선하지 못했다. 보는 사람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물고기에 "Fish"라고 쓴 거며, "오 병"도 너무 단조롭게 그려졌다. 과감히 선을 삐뚤빼뚤하게 하거나, 굵고 가는 선을 섞었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림은 보는 사람에게 궁금증을 불러일으켜 자꾸 보고, 오래 보며, 그 안에서 이야기를 찾을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리 비밀을 다 알려주면 재미가 없다. 배우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나를 위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