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봄 학기
학기가 끝이 났다. 마지막 과제물은 기억 속 한 장면, 또는 물건을 추상적인 이미지로 나무, 유리, 철판 등, 캔버스가 아닌 표면에 그리는 것이었다. 나는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종이 상자를 이용하기로 했는데, 아내가 큰 물건을 살 때 따라온 골판지를 골라 주었다. 두툼한 골판지였는데, 판지 사이의 물결 모양 골 때문에 생각지도 않았던 멋진 효과가 생겨났다.
보기에는 아무렇게나 그린 것 같지만, 추상화는 대상을 잘 관찰하고 이미지를 잘라 작가 나름 해석을 해서 그리는 그림이다. 나는 세 가지 스케치를 해서 교수에서 보여 주었다.
내가 선택한 세 가지 소재는 (1) 역마차와 말 – 내 나이 6-7살쯤 되었을 무렵의 일이다. 아직 소아마비를 고쳐보겠다고 이곳저곳을 전전하던 때다. 침과 뜸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둘 다 어린아이에게는 무섭고 힘든 일이었다. 한의원에 가지 않으려는 내게 어머니가 울지 않고 치료를 잘 받으면 상을 주겠다고 했고, 그렇게 해서 얻는 것이 말이 끄는 역마차 장난감이었다. (2) 꿈 – 무엇엔가 몸이 끼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꿈이다. 이 꿈을 꾸고 나면 꼭 아팠다. 어른이 되고 난 후 이 꿈은 더 이상 꾸지 않게 되었다. (3) 봄날 – 벽제에 살 던 때의 일이다. 우리 집은 약간 언덕진 곳에 자리하고 있어, 내 방 창으로 밖을 내다보면 저 멀리 논과 밭이 보였다. 겨우내 문을 꽁꽁 닫고 있다가 봄이 되고 날이 따스해지면 창문을 연다. 멀리 보이는 논/밭에서는 농부가 두렁을 손보는 것이 보인다. 삽으로 흙을 떠서 올리고 내리쳐 두렁을 다지는데, 분명 내리치는 것을 보았는데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다시 흙을 떠서 올리면, 그제사 ‘퍽’하며 둔탁하게 내리치는 소리가 들린다.
과학상식으로 소리는 빛보다 더디게 전달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장면은 내게 꽤 인상적으로 남았다.
위의 세 가지를 스케치해서 교수에게 보여주니, 단연 (3) 번이 좋다고 그걸 그려보라고 한다.
문제는 소리가 전달되는 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첫날 교실에서 그린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2-3일 생각을 거듭한 끝에 그래프식의 음파를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결과물은 나름 예상보다 잘 나왔다.
지난 수년 동안 아내가 들었던 미술 클래스에서는 늘 종강 때 팟럭 파티를 했다. 이번 학기에도 그녀의 도자기 클래스는 마지막 수업 후 음식을 나눈다. 이미 지난주에 리스트를 돌려 각자 가져올 음식물을 적어 냈다고 한다. 아내는 만두를 구워 갈 것이다.
종강 일주일 전, 수업이 끝나고 교수에게 혹시 팟럭이 있는가 하고 물어보니 간식을 가져와 나누고 싶으면 해도 된다고 한다. 마지막 수업에 난 초코파이 2 상자를 들고 갔고, ‘에이미’라는 이름의 여학생이 도넛을 사 온 것이 전부다.
다음 학기를 기약하며 작별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2024년 봄학기는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