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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책 이야기

노인력

책 이야기

by 고동운 Don Ko

저자 ‘아카세가와 겐페이’는 전위 예술가, 작가, 그리고 초예술 토마손과 (일본에 진출한 미국 야구 선수 게리 토머슨을 보고 만든 용어. 기능적인 역할이 없지만 예술적으로 보이는 건축물의 구조를 칭한다.) 노상관찰학의 제창자였다.


90년대 발표한 글들을 모은 것이니, 25년이나 지났다. 이 책을 썼던 무렵, 그의 나이는 60대 초반. 요즘은 60대를 노인이라고 부르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60대가 되면 노인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모양이다.


여기서 말하는 노인력은 노인들이 나이가 들며 겪게 되는 일들을 노쇠현상이 아닌 노인에게 생기는 능력으로 본다는 의미다. 디지털 문화가 젊은이들의 것이라면, 아날로그 적인 것은 노인력에 속한다.


책으로 들어가서,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4년 정도 지났을 무렵, 중학생 시절, 그는 박 선생에게서 멋 부리는 요령을 배운다. “셔츠를 입고 바지를 입고 벨트를 한 후, 반드시 일단 몸을 구부려 셔츠 아래쪽을 살짝 빼서 풍성하게 보이도록 하라… 바지 끝을 접을 때도 한쪽 바지를 한 단 더 많이 접거나 이발소에서 머리를 자르고 나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탈탈 털며 헝클어뜨리는 등…” 프랑스인은 양복을 새로 맞추어도 바로 입지 않는다. 창가에 걸어 두어 햇빛을 받아 약간 바래거나 뻣뻣함이 사라지면 그때부터 입는다. (167 페이지)


과거에는 직업학교가 일상에 가까이 있어 모두 아무렇지도 않게 공업이나 상업계 고등학교에 갔다. 어느새 모두 대학에 가는 코스가 되었다. (210 페이지) 이런 현상은 미국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노인은 천천히 넘어진다. 조금씩 현역에서 물러나 시력이 흐려지고 건망증이 생기며 허리가 아프고 이가 빠지면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넘어진다. 이렇게 느릿느릿 넘어지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넘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237-238 페이지) 이가 빠지는 것을 제외하면 정확하게 내게 생겨나고 있는 증상들이다. 내게도 노인력이 생겨나는 모양이다.


“북한은 사실 노인력의 나라 아닐까 생각했어요.” 북한에 다녀온 언론인이 그에게 들려준 이야기다. 그의 말인즉, 공항에서도 호텔에서도 사람들이 양손을 뒷짐 지고 등을 살짝 구부린 채 멍하니 서 있더라는 것이다. (266 페이지) 그러고 보니 북한 사람들 사진에서는 이런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처음에는 매년 제삿날이 되면 성묘를 갔다고 한다. 그 후, 점점 발길이 뜸해졌다. 그는 묫자리에는 무언가 덤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근처에 맛있는 메일 국숫집이 있다든지 꽃구경을 할 수 있다는지 하는 부산물이 있으면 훨씬 더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이라고. (376 페이지)


맞는 말이다. 우리 집도 마찬가지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2년 동안 기일이면 아내가 음식을 장만하고 동생들을 불러 제사를 지냈다. 2년쯤 되니 형이 부르니 할 수 없이 오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아 제사를 그만두었다. 그 후, 한동안은 기일즈음에 형제들이 산소에서 만나 성묘도 하고 함께 밥을 먹기도 했는데, 이제는 그것도 없어졌다. 나 또한 일 년에 한 번 부모님 산소에 갈까 말까 하는 정도가 되었다.


400페이지가 넘는 꽤 긴 책인데도 지루함 없이 읽었다. 재미있고, 이것저것 배우는 것도 많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아날로그적 삶이 지닌 멋에 공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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