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년 봄 미국에 왔다. 부모님이 개업을 했던 갈빗집은 경영난 끝에 결국 문을 닫았고, 조그마한 편의점을 하시게 되었다. 마음 편히 학교만 다닐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전화번호부를 보고 50여 군데 관공서와 기업에 구직 편지를 보냈다. 많은 곳에서 답장을 해 주었다. 그러나 경력도 없고 학력이라고는 미국 고등학교 졸업자격이 (GED) 전부인 내게 일자리를 주겠다는 답장은 없었다. 대부분 공부를 더하고 자격을 갖춘 다음 다시 연락하라는 내용이었다. 그중, 장애인 재활국에서 도움을 줄 수 있으니 연락하라는 답이 왔다.
찾아가 만난 카운슬러는 직업학교에 보내 줄 테니 전자기기 조립공이 되어 보라고 했다. 그 무렵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방위산업체가 호황을 누리고 있었고 많은 이민자들이 단기 교육을 받고 전자기기 조립공이 되었다. 나는 기껏 공장의 조립공이 되려고 미국에 온 것이 아니라며 사무직을 고집했다. 며칠 간의 실랑이 끝에 그는 내게 필기시험을 치러 필요한 점수가 나오면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가 요구하는 성적이 나오자 사무직 구인 정보를 주었다. 그렇게 해서 작은 부동산 사무실에 들어갔다.
80년대 초반 미국은 경기가 좋지 않았다.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고 거래도 한산했다. 한 달에 두 번 받는 봉급도 며칠씩 미루어지곤 했다. 좀 더 안정적인 직장이 필요했다.
그러던 중, 도로국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던 교우가 우연한 기회에 내게 공무원에 지원해 보라고 권유를 했다. 봉급은 일반 회사에 비해 다소 적지만 복지혜택이 좋고 시간도 여유가 있다고 했다.
80년대는 아직 장애인법이 (ADA) 생겨나기 전이다. 장애인이며 아직 대학 졸업장도 없는 내가 일반 사기업에서 경쟁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한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공무원직의 인기가 사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좋은 학교를 나오고 야망이 있는 젊은이들은 사기업을 선호한다. 공무원직에는 취업시장에서 다소 경쟁력이 떨어지는 이들 또는 이민자들이 많이 지원한다.
재활국의 카운슬러에게 의논하니 한 번 해보라며 공무원 시험 정보를 주었다. 말단 사무직인 ‘Office Assistant’ 시험에 응시를 했다. 시험 준비를 위해 도서관에 가니 ‘Civil Exam’ 책자가 몇 권 있었다. 그런데 이게 말도 안 되게 쉬운 내용이었다. 간단한 산수와 파일링에 필요한 알파벳과 숫자의 순번을 찾는 정도의 내용이 아닌가. 막상 시험을 보니 정말 그런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