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직인 WCIR 시험을 보려면 4년제 대학을 졸업했거나 WCIT B로 2년 이상 근무를 해야 한다. WCIR 시험 공고가 붙었다. 잘 읽어보니 WCIT B 근무 기간이 부족한 사람이나 4년제 학위가 없는 사람은 양쪽을 합쳐서 응시할 수 있었다. 그 무렵 나는 WCIT B로 1년 이상 근무를 했고 대학도 2학년을 마친 상황이었다. 양쪽의 경험을 절반씩 합쳐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필기시험에 합격하고 면접 후 채용이 가능한 3순위 안에 이름을 올렸다.
승진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본사의 인사과(personnel department)에서 편지가 왔다. WCIT B로 2년 근무를 마친 후에 승진 대상에 넣어 준다는 내용이었다. 시험 공고를 잘 읽어보라고 전화로 서면으로 항의를 했지만 내 말을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았다. 승진대상자는 4년제 대학을 졸업했거나 WCIT B로 2년 근무를 해야 한다는 말만 반복했다.
필요하면 주정부 인사과에 어필을 하라고 했다. 주정부에 어필을 접수했다. 미국의 공직사회에서는 일이 더디게 진행된다. 나는 몇 달 후 회사가 요구하는 WCIT B 근무연한을 채워 WCIR (보험 조정관)으로 승진이 되었고, 몇 달이 더 지난 후 주정부 인사과에서는 내가 옳았다는 결정을 보내왔다.
미국의 관청에서는 그날 운에 따라 일이 잘 풀리기도 하고 꼬일 수도 있다. 법규나 규정이라는 것이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하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공무원의 재량권이라고 할 수도 있다.
운전면허를 아직 종이로 발행하던 80년대의 일이다. 면허증을 주머니에 넣어둔 채 옷을 빨았더니 휴지가 되어 버렸다. 새로 발급받기 위해 차량국(DMV)에 갔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미국에서 가장 비효율적인 곳이 바로 차량국이다. 그날도 예외 없이 줄은 길고 직원들은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침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내가 담당 직원에게 까칠하게 말을 했던 모양이다. 서로 언짢은 소리가 오가고 나는 수퍼바이저를 불러오라고 큰소리를 냈다.
가재는 게 편이라지 않았나. 수퍼바이저야 당연히 직원의 편을 들어주었다. 문제는 그다음에 발생했다. 면허증을 발급해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장애인 운전장치를 갖춘 차만 운전해야 하는데 내가 가지고 있던 면허증에는 그런 제한 내용이 들어가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운전시험에 합격을 해서 면허증을 발급받았고 그동안 잘 운전을 하고 다녔는데 무슨 말이냐고 해도 마이동풍. 다시 주행시험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시험을 보기 위해 줄을 서 있는데, 마침 그때 다가오는 시험관은 바로 수년 전에 내게 운전을 가르쳐 주었던 운전학교 선생이 아닌가. 웬일이냐고 물으니 차량국에 시험관이 부족해서 임시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를 차에 태우고 주행시험을 본 후에야 새로 면허증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얼마 전에는 우리가 입양해서 키우는 조카아이들의 여권을 만들기 위해 우체국에 갔었다. 우체국에서는 여권발급 대행업무를 하고 있다. 필요한 서류를 다 가지고 갔는데, 담당 직원은 아이들의 한국 출생기록을 가져오라는 것이다. 법원의 입양 승인을 받아, 미국에서 새로 출생증명을 받았고, 그 서류로 이민국에서 시민권을 받았는데,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실랑이가 시작될 판인데 마침 곁에 있던 선임 직원이 이민자의 경우에는 내가 가지고 간 서류만으로도 여권이 발급된다며 접수를 하라고 했다.
미국의 관공서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이를 어필할 수 있고 결국에는 법대로 처리된다. 하지만 이런 과정이 모두 복잡하고 시간과 노력이 드는 일이다.
요즘은 관공서에 가면 절대 큰소리를 내지 않는다. 가급적이면 담당 직원의 눈치를 보며 선처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