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성당에서 영세를 받은 직후의 일이다. 나이 드신 자매님 한 분이 내게 오시더니 기도를 부탁하셨다. 아직 어린 자녀가 있는 딸이 유방암인데 상태가 심각하다고 했다. 새로 영세받은 사람에게는 기도의 힘이 있다며 딸의 쾌유를 비는 기도를 부탁하셨다. 그 무렵 나는 한 두 차례 영적인 체험도 한터이라 정말 그런가 하는 마음으로 딸을 위한 기도를 몇 차례 드렸다.
정작 내 기도가 효험이 있었는지는 확인해 보지 못했다. 만약 상태가 나빠졌으면 그분이 더 상심할 것 같아서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난봄 그분이 돌아가셨으니 이제 확인할 길은 없어졌다.
외할머니는 식구가 아프거나 집안에 걱정거리가 생기면 달달한 백설기를 쪄서 냉수와 함께 상에 올려 장독대로 갔다. 가끔은 북어가 오르기도 했다.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연신 손을 비비며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며 치성을 드렸다.
한국에서는 수능시험이 다가오면 교회의 기도회나 절을 찾는 사람들의 수가 크게 늘어난다고 한다.
나는 구복 기도의 힘은 물론 그 효과에 대해서도 다소 부정적이다. 사람들은 일이 잘 풀리고 걱정거리가 없을 때는 기도에 매달리지 않는다. 자신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 닥쳤을 때, 간절히 기도한다. 그러니 확률적으로 그 일은 이미 잘 해결되기 힘든 상황에 놓인 것이다.
나는 우리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며 매달려야 겨우 그 사정을 알 수 있는 분이 하느님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전지전능한 하느님은 내가 굳이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아니 내가 채 생각을 갖지 않아도, 이미 알고 계시다고 믿는다.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도 동시에 수백만명의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세상이다. 아마존의 인공지능은 내가 어떤 음악을 즐겨 듣고, 어떤 류의 책과 영화를 좋아하며, 의복은 물론 좋아하는 기호식품까지 파악하고 있다.
그러니 하느님이 내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은 일도 아니다.
우리가 울며불며 매달려 기도하는 내용이란 것이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참으로 어리석고 보잘것없는 것일 수도 있다. 지금도 쉼 없이 팽창하는 우주, 수백 광년을 두고 흐르는 세월 속에서 우리는 티 끝 보다도 미미한 존재이며, 수능 성적이나 암 따위는 존재의 가치도 없는 일이다.
기도는 바쁜 일상에서 가질 수 있는 짧은 피정의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기도를 하며 내게 주어진 운명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우주 만물 중 주어진 운명을 피해 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던가. 고난과 어려움도 잠시 지나가는 소나기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