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에서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동운 Don Ko Jan 24. 2018

난 여름에도 반바지를 입지 않는다

일상에서...

무더운 날씨가 며칠째 계속되고 있다. 밖에 나가보면 반바지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의 수가 부쩍 늘었다. 금년 여름에도 변함없이 난 긴바지를 입고 지낸다. 내 옷장에는 아예 단 한벌의 반바지도 없다.


내 나이 열두, 세 살 때쯤의 일이 아닌가 싶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여름이 되면 짧은 바지를 입고 지냈다.

어쩌면 아버지의 심기가 안 좋았었는지 아니면 평소부터 마음에 담아두고 계시던 생각이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날도 나는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형제들은 모두 학교에 가고 아마도 집에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꾸짖는 투로 왜 아이에게 반바지를 입혀 보기 흉한 다리를 내놓고 있느냐며 긴바지를 입히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날 바로 긴바지로 갈아있었는지 아니면 다음날 옷을 바꾸어 입었는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분명한 것은 그날 이후로 나는 다시는 짧은 바지를 입지 않게 되었다.


80년대 초, 미국에 와서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장애인에게 휠체어 테니스를 가르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놀랍게도 소변주머니를 다리에 차고도 반바지를 입은 장애인과 긴 세월 걷지 않아 근육이 쪼그라든 다리를 짧은 치마 아래로 내놓은 여성장애인을 만나게 된 것이다. 반바지를 입은 그의 한쪽 가랑이에서 삐져나온 호스가 종아리에 찬 주머니에 연결되어 있었고 노란색의 소변 방울이 그 안으로 똑똑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자신의 장애를 당당하게 드러내고 사는 미국 장애인들의 모습은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나는 반바지를 입지 않고 지낸다. 이미 굳어버린 나의 의식을 바꾸기가 힘들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나의 부친은 내게 반바지를 입히지 말라고 한 사실조차도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이제 내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심코 내 던지는 한마디 말, 생각 없이 내리는 결정이 다른 사람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다.


여름이 되고 반바지 입은 사람들의 건강한 다리를 보게 되면 난 혹시 지난겨울 내가 던진 말 한마디에 상처받은 사람은 없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세월은 그렇게 흘러가 버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