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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동운 Don Ko Feb 28. 2018

남기고 싶은 이야기

이 아침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를 준비하며 내가 아버지의 삶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은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의 낡은 사진첩을 정리하며 언제 어디서 누구와 찍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사진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한국의 격동기를 살았던 파란만장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테이프에 담아 훗날 정리하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지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아버지가 병석에 누우신 다음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15살의 나이에 무슨 생각으로 고향을 떠나 만주로 갔는지, 부모 형제를 지척에 두고 부하들과 후퇴의 길에 나설 때는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 영어도 서툴고 양식도 좋아하지 않으며 왜 미국에 왔는지, 알고 싶고 듣고 싶은 아버지의 속마음은 이제 땅에 묻혀버렸다.


더러 남들이 쓴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읽으며 굳이 이런 것을 글로 남겨야 하나 하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다. 젊고 철없던 시절의 이야기다. 요즘은 나도 더 늦기 전에 후손들에게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을 글로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아이들은 한국말이 서투니 영어로도 따로 한번 더 써야 할 판이다.


나이 60에 벌써 가물가물해지는 기억들이 늘어가고 있다. 아마도 사실과는 다소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일들도 있을 것이다. 그나마 기억이 남아있으면 다행인데 이젠 기억조차 안나는 일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아직 일가친척 형제들의 정신이 멀쩡할 때 이야기를 시작해야 잃은 기억도 찾고 잘못된 기억은 고쳐 좀 더 사실에 가까운 이야기가 될 것 같다.


기억은 시간여행이다. 돈은 없다가도 벌 수 있고 가지고 있던 것을 잃을 수도 있지만 기억의 시간여행은 우리들의 기억이 남아있을 때만 할 수 있는 여행이다.


얼마 전 회사에서 컴퓨터가 말썽을 부려 지난 수년 동안 작업해 놓았던 파일들을 모두 잃어버릴뻔한 일이 있었다. 그날 이후 매일 백업을 해 두고 있다. 컴퓨터의 파일이 날아가도 백업 파일을 꺼내오면 된다. 지난 일들을 기록하고 사진을 정리하는 일은 기억의 백업 파일을 만드는 일이다.


몇 년 전 성당에서 창립 20주년 기념책자를 만드는 일을 한 적이 있다. 과거를 돌아보며 정리하고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자는 취지였다. 대개의 단체들이 20-25년을 맞는 시기에 이런 일들을 하는 것 같다. 오래된 주보를 보니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양에 내용도 달랐다. 낯선 이름들 사이에서 익숙한 이름을 찾으면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를 함께 공유했던 이들에게는 이 책자가 더 특별하고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들도 인생을 살며 25, 50, 75세쯤에 기념책자를 만들어 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20대가 쓸 수 있는 글이 있고, 40/50대가 쓸 수 있는 글이 있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 젊은이의 감성으로 그 시절의 이야기를 쓸 수 없다는 의미다. 살아온 이야기, 생각들을 정리해서 써내려 가고 사진도 정리해서 굳이 출판은 하지 않더라도 스크랩 북 정도로 만들어 놓으면 좋을 것 같다. 컴퓨터를 이용하면 쉽게 정리할 수 있고 블로그를 운영하면 남들과 공유할 수도 있다.


기억이 허락하는 한 정직한 글을 남길 것이다. 내가 살았던 삶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는 글을 쓰고 싶다. 잘못은 인정하고 후회와 회한도 남겨 화해와 용서의 글이 되었으면 한다. 무엇보다 내가 없는 세상에서 나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가끔 꺼내보고 나를 마주한 듯 읽을 수 있는 글을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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