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밀선

by 고동운 Don Ko

일가친척이나 아는 이 조차 없는 만주는 결코 만만한 땅이 아니었다. 입에 풀칠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시장터 가게에서 점원 노릇을 하며 어렵사리 숙식을 해결하게 되었다. 머리가 좋고 일본어에 능숙하던 아버지에게 주변에서는 군에 입대할 것을 권유했다. 어영부영하다가 어차피 일본군 징집에 걸려들 상황이기도 했다. 그래서 만주에 있던 일본군에 자원입대를 한다. 군대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태평양 전쟁에서 밀리기 시작한 일본군은 만주에 있던 군인들을 모아 태평양 전투에 투입한다.


이름도 모르는 남방의 어떤 섬에 떨어져 자칫 몰살을 당할 수도 있던 상황에서 일본의 모조건 항복으로 해방을 맞은 아버지는 몇 달 후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소 판 돈을 가지고 도망을 나갔던 아들이지만 부모는 아들이 살아온 것만으로도 기뻐했다. 재회의 기쁨도 잠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다시 고향을 등질 것인지 아니면 공산주의자들에게 동조하며 살아야 할 것인지 고민을 하는 아버지에게 할머니가 서울에 다녀올 것을 종용했다. 외사촌 동생을 데리고 서울에 다녀오라는 것이었다.


홍씨 집안의 딸이었던 할머니에게는 장손인 남동생이 있었다. 아버지의 외할아버지는 제법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일찍이 외아들을 일본에 보내 유학을 시켰는데, 장손이니만큼 손을 보기 위해 15살에 나이가 서너 살 많은 건너 마을의 색시와 결혼을 시켰다. 방학에 집에 와서 잠시 머무는 동안 아이를 만들어 아들 하나, 다음 해 방학이 끝나고는 딸 하나를 낳았다. 그러나 일본에서 신식 문물을 접한 그에게 고향의 시골 여인은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 몰래 일본에서 만난 여인과 살림을 차렸다. 해방이 된 후에는 남한에 돌아와 살고 있었다. 노인은 손주를 아비가 사는 남쪽으로 보내는 것이 안전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리게 자란 그를 혼자 내보내는 것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외손자인 아버지를 딸려 보내려고 한 것이다.


아버지의 외삼촌은 후에 대구에 청구대학이라는 사립대학을 설립한 ‘홍형의’ 선생이다. 그는 무정부주의를 신봉하였으며 배우기 쉽고 중립적인 언어를 목표로 만들어진 인공어인 ‘에스페란토’를 한국에 소개한 사람이기도 하다. 우린 그분을 ‘대구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채 60도 되기 전에 길에서 쓰러져 돌아가셨는데, 그의 아들인 아버지의 외사촌은 부친이 사립재단 이권문제에 연루되어 린치를 당한 것이라고 믿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마음에 내키는 청은 아니었다. 외가에 가서 받고 자란 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방학을 해서 외가에 놀러 가면 외숙모는 잡곡을 둔 밥에서 쌀밥은 시아버지와 자신의 아들에게 퍼주고 아버지에게는 잡곱만 골라 퍼 주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맛있는 간식거리가 있으면 친손주만 몰래 불러서 주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빈둥거리며 고향에 있는 것보다는 할아버지에게서 노잣돈을 받아 서울에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싶어 못 이기는 척 길을 나섰다.


이때는 이미 38선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웃돈을 주고 밀선을 구해서 타야 했다. 밀선은 한겨울의 바다에서 엔진 고장을 일으켜 표류를 하게 된다. 며칠 만에 먹을 물도 떨어지고 음식도 떨어졌다. 아버지는 그때 배의 선원을 따라 구석진 곳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 음식물을 얻어가는 여인들을 보았다고 한다. 물을 담아 두었던 통에 손을 넣어 얼음조각을 집어 목을 축일 수 있었는데, 아버지의 손은 커서 작은 구멍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함께 있던 외사촌은 손이 작아 얼음을 집을 수 있었는데, 늘 아버지에게 “형님 먼저 먹어” 하며 내밀었다고 한다.


천신만고 끝에 남한에 도착한 두 사촌은 결국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다.


또다시 만주에서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아버지는 이런저런 일을 하며 입에 풀을 칠하다가 하루는 해양경비대를 모집한다는 벽보를 보게 된다. 신체 건강하고 일본군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어 쉽게 선발이 되었다. 얼마 후 해양경비대는 해군이 된다. 막상 해군이 되었지만 배를 타야 하는 해군인 아버지에게는 뱃멀미라는 약점이 있었다. 그러나 하늘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뱃멀미에 시달리지 않아도 될 기회가 찾아왔다. 해군에서 지원자를 받아 해병대를 창단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소위 계급장을 달고 해병대 창설멤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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