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어둠 속에서 식구들이 모두 잠들기를 기다린다. 눈을 감고 언제 다시 보게 될지 모르는 동생들의 얼굴을 하나씩 그려본다.
아버지가 다음장에 소를 팔러 간다는 소식을 들은 후 며칠을 고민하며 내린 결정이다. 날이 밝기 전에 집을 떠날 것이다. 새로운 세상이 들어왔다는 기회의 땅 만주에서 성공하여 돌아와서 아버지께 소와 돼지도 사 드리고 농사지을 땅도 사드릴 것이다. 아직 어린 동생들 중에 공부를 더 하고 싶은 놈이 있으면 만주에 데려다가 학교에도 보내 줄 것이다.
송아지 때부터 기른 소를 제법 좋은 값에 팔았다며 약주까지 한잔 걸치고 돌아온 아버지, 오늘도 다음 제사 음식을 준비하느라 하루 종일 쉴 틈 없이 일을 했던 어머니, 감자만 먹고도 힘이 남아도는지 하루 종일 뛰어다니던 동생들은 모두 곤히 자고 있다. 이제 웬만한 소리에는 깨어날 것 같지 않았다.
어머니가 장롱에 고이 넣어 둔 소 판 돈이 어디에 있는지 소년은 정확하게 알고 있다. 어둠 속에 일어난 소년은 살그머니 장롱을 열어 돈보따리를 꺼내 대충 손짐작으로 절반 가량의 지폐를 바지춤에 넣는다. 남어지는 다시 헝겊 주머니에 넣어 장롱에 남겨둔다.
아버지는 소 판 돈으로 빚을 갚고 새로 송아지를 살 요량이었다. 절반 남은 돈으로는 빚을 갚거나 송아지를 사거나 둘 중의 하나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송아지를 사서 다시 기르면 내년에 장에 내다 팔 수 있을 것이다. 집안일을 잘 거드는 바로 아랫 동생이 소를 잘 돌보아 줄 것이다. 만주 가서 얼른 돈을 벌어 여름이 오기 전에 어머니께 돈을 보내 드리면 남은 빚도 값을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돈을 챙긴 소년은 혹시라도 자고 있는 동생들을 밟을까 조심조심 까치발로 방을 나선다. 헛간 한구석에 미리 숨겨 놓았던 가방을 집어 들고 기차역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가방에는 헌 옷 몇 가지와 삶은 감자 몇 알이 들어있을 뿐이다.
소년은 이 길이 다시는 가족들과 마주치지 않을 갈래 길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두려움과 희망에 부푼 가슴을 안고 걸음을 재촉했다. 이 소년이 내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려면 할아버지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함경남도 홍원이 고향인 할아버지는 어려운 농가의 둘째 아들이었다. 일찍이 아들이 없는 친척집에 양자로 들어갔다. 그래서 할머니는 팔자에 없는 남의 종갓집 며느리 행세를 하며 살게 되었다. 일 년 12달 중 한 달도 제사를 거르는 때가 없었다고 한다. 함경도에서는 제사상에 생선이 오르는데, 장에서 생선을 사다가 기다란 장대에 매달아 꾸덕하게 말려 제수를 장만해야 했다. 여름이면 파리를 피해 장대를 이어 더 높이 매달아야 했다.
어린 자식들을 거느리고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 없이 음식을 장만하여 제사상을 차려 놓으면 시어머니는 시집 간 시누이들까지 데리고 나타나 이런저런 음식 타박을 한 후 한상 잘 차려 먹고 돌아갈 때면 음식을 한 보따리씩 싸들고 갔다. 할머니는 애써 장만한 음식을 자식들에게 제대로 먹여 보지도 못하고 또 다음 제사를 걱정하여야 했다.
농사짓는 집안에서는 자식이 큰 재산이다. 자식이 자라 힘을 보태주면 그만큼 농사일이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남인 아버지는 농사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꿈은 기차 기관사가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철도학교로의 진학이 여의치 않게 되자 젊은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던 대도시 만주로 가출할 생각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