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바퀴가 굴러가던 소리, 그 등 뒤에서

by 돈미새

전쟁이 지나간 자리는 늘 말이 많다. 흉터니 폐허니 하는 이름들이 먼저 붙는다. 하지만 내 기억 속 그곳은 그런 단어들보다 먼저, 바퀴가 자갈을 씹는 소리였다. 낡은 짐자전거 한 대가 비틀거리며 길을 냈고, 쇠사슬은 어쩐지 제 몫보다 크게 울었다.

나는 지금, 내 생의 가장 오래된 기억을 꺼내려 한다. 거창한 역사는 아니다. 다만 짐자전거의 삐걱임, 내 시야를 가로막던 한 남자의 넓은 등, 그리고 장날이면 어김없이 들러붙던 시장 골목의 냄새 비린내와 단내가 구분 없이 뒤엉켜 코안에 스미던 그 감각에 관한 이야기다.

할아버지는 말수가 적었다. 적다기보다, 말을 아껴 두는 쪽에 가까웠다. 전쟁은 그의 집과 가축, 젊은 날의 시간을 한꺼번에 앗아갔지만, 그는 폐허 앞에서 울지 않았다. 대신 페달을 밟았다. 무너진 벽돌 틈에서 그가 붙잡은 삶의 방식은 단순했다. 걷지 않고 구르는 것, 멈추지 않고 어딘가로 짐을 옮기는 것. 그는 보부상이었다. 그 말이 당시엔 왠지 촌스럽게 들려서, 나는 친구들 앞에서 그 직업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나의 유년은 그 자전거의 뒷자리에서 흘러갔다. 딱딱한 철제 짐받이는 여름이면 뜨겁고, 겨울이면 살을 물었다. 오래 달리면 엉덩이가 얼얼해졌고, 녹슨 철이 바지에 쓸려 붉은 자국을 남기곤 했다. 나는 그 자국이 싫어 바지를 털어냈지만, 할아버지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바람이 불면 그의 셔츠가 부풀었고, 오르막에서는 숨이 목에 걸린 듯 거칠어졌다. 그 숨소리가 내 귓가로 넘어올 때면, 나는 괜히 코를 찡그렸다. 땀내가 났다. 그게 싫어서, 그때는 철학이고 뭐고 없었다.

시장은 늘 소란스러웠다. 사람들은 소리를 높였고, 바닥은 늘 젖어 있었다. 구정물이 신발에 튀면 기분이 상했지만, 닦을 데가 마땅치 않았다. 할아버지는 자전거를 세우고 나를 내려놓았다. 내려놓았다고 말하는 게 맞다. 손길은 조심스럽지 않았고, 엉덩이가 철제에서 떨어질 때 나는 잠자코 균형을 잡아야 했다. 그는 내 눈을 보지 않은 채 턱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가서 사 와라.”

대개는 두부였다. 그 한마디가 싫었다. 설명도, 이유도 없었다. 나는 한참이나 젖은 땅만 내려다보다가, 어쩔 수 없이 가게들을 기웃거렸다. 어떤 두부는 물이 탁했고, 어떤 것은 모서리가 이미 무너져 있었다. 주인들의 얼굴은 제각각이었다. 지나치게 친절한 눈빛도 있었고, 바쁘다는 표정으로 손짓부터 하는 이도 있었다.

“이거 얼마예요?”

내 손에 쥐어진 동전이 작다는 걸 그들은 금세 알아봤다. 아이라서 덤을 얹어주는 사람도 있었고, 아이라서 흠 있는 걸 밀어 넣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 차이를 정확히 말로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몸으로는 느꼈다. 싸게 부르는 목소리에는 급함이 섞여 있었고, 값을 깎아주지 않는 얼굴에는 묘한 여유가 있었다.

흥정을 마치고 돌아오면 할아버지는 말없이 두부를 들춰봤다. 손끝으로 눌러보고, 물기를 훑었다. 잘 산 날에는 호떡 하나가 내 손에 쥐어졌다. 김이 올라오고, 설탕물이 손가락을 타고 흘렀다. 뜨거워서 손을 바꿔 쥐며 먹는 그 단맛이 좋았다. 반대로, 두부가 물러 터진 날엔 아무 일도 없었다. 꾸중도, 호떡도 없이 그는 다시 페달을 밟았다. 나는 흔들리는 짐받이 위에서 괜히 바지를 매만지며, 입안에 남은 쓴맛을 삼켰다.

그때는 몰랐다. 그가 무엇을 가르치려 했는지. 아니, 어쩌면 가르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런 장날들이 지나고, 시장의 냄새가 점점 기억에서 옅어질수록, 이상하게도 그 무심한 턱짓과 엉덩이의 얼얼함만은 오롯이 남았다.

세월이 흘러 자전거 소리는 사라졌고, 더 이상 달그락거리는 짐받이와 페달도 멈추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어떤 선택 앞에 서면 문득 그 짐받이를 떠올린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싼 제안이나, 지나치게 매끈한 말 앞에서, 나는 속으로 묻는다. 왜 지금이어야 하는지. 그 질문에 답이 없을 때도 많다.

이 이야기는 폐허 위에서 삶을 이어가던 한 남자와, 그 등 뒤에서 세상을 흘끗거리며 자라난 한 아이의 기록이다. 나는 이것이 모범적인 교훈으로 읽히길 바라지 않는다. 다만, 읽는 이의 마음 어딘가에 정리되지 않은 감각 하나쯤 남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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