볏짚 냄새 사이로 젖비린내가 희미하게 섞여
경주에 봄이 왔다는 말을 사람들이 입에 올리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바람에서는 아직 흙냄새가 났고, 그 냄새가 점점 옅어지고 있다는 걸 아버지는 알았다. 땅이 식고 있다는 뜻이었다.
마을 어귀에서부터 쿵,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곡괭이가 내려찍힐 때마다 땅이 울컥거렸다. 밭을 가는 소리와는 달랐다. 흙을 뒤집는 게 아니라, 찍어 누르는 소리였다. 땅이 숨을 쉬지 못하게 되는 소리.
“공장이라더군.”
마름 이 씨가 말했다. 논두렁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연기는 바람에 금세 찢어졌다.
“단추 찍는 공장이래. 조개 껍데기, 소뿔… 그런 걸로.”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쟁기를 쥔 손에 힘만 들어갔다.
논 한가운데에 박힌 말뚝들이 눈에 들어왔다. 흙 위에 줄이 쳐져 있었다. 논은 아무 말도 없었고, 사람들만 바빴다.
며칠 뒤, 최부자가 왔다.
아버지는 갓을 고쳐 쓰고 다가갔다. 말 몇 마디만 하면 될 거라 생각했다. 그 말이 먹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애써 하지 않았다.
“대감마님.”
아버지는 허리를 굽혔다. 가죽신이 가까웠다. 너무 가까워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 논을 엎으면… 저희는—”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최부자는 바닥을 보고 있었다. 흙 위에 하얀 게 하나 떨어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주웠다. 단추였다. 손가락 끝에서 미끄러졌다.
“이건 안 썩네.”
최부자가 말했다. 아버지를 보지 않고.
“쌀은 썩지. 쥐가 먹고, 물 먹고.”
그는 단추를 손바닥에서 굴렸다. 딱, 딱.
아버지는 그 소리가 싫었다.
“허나 이건 남는다.”
아버지는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제 처와, 아이가—”
“집세 올릴 걸세.”
말이 겹쳤다. 최부자는 이미 등을 돌리고 있었다.
“이번 달부터.”
그뿐이었다.
아버지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말을 더 해야 할 것 같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입 안이 말라 있었다. 침을 삼키자 비릿한 맛이 났다. 피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그런 맛이었다.
그날 밤, 아버지는 판잣집 바닥을 더듬었다.
거적 아래에 헝겊이 있었다. 묶어 둔 엽전 꾸러미. 풀지 않았다. 풀면 안 될 것 같았다. 손으로 쥐는 것만으로도 속이 서늘해졌다.
방 안에서는 아이가 젖을 빨고 있었다.
쭙, 쭙. 힘없는 소리였다.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면 숨이 더 찰 것 같았다.
아버지는 아이를 보았다.
얼굴이 작았다. 너무 작아서, 이 얼굴이 앞으로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하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흙은 못 만지겠지.’
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
슬프다거나, 억울하다는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생각이 났다.
아버지는 헝겊을 다시 품에 넣었다.
농사는 끝났다고 말해 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는 알았다. 끝난 것들은 보통 그렇게 끝났다.
아이의 이마를 짚었다. 따뜻했다.
그 온기가 반가운지, 부담스러운지 알 수 없었다.
“가자.”
소리 내지 않고 입만 움직였다.
“여기서는…”
말이 더 이어지지 않았다. 굳이 끝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아버지는 등을 폈다가, 다시 굽혔다.
짐이 없어도, 이미 굽은 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