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통 뚜껑이 열려 있던 아침
무쇠 냄비 바닥을 긁어대는 쇳소리는 쌀통 뚜껑이 열려 있던 아침부터 시작되었다. 긁을수록 더 희게 드러나는 바닥을 어머니는 몇 번이고 확인하듯 문질렀고, 그 마찰음은 임금이 밀릴 거라던 반장의 낄낄거림과 뒤섞여 방 안을 떠돌았다. 어머니는 입을 닫았다. 대신 소리가 모든 것을 말했다.
봄이는 그 소리 사이에서 셔츠 단추를 더듬었다. 구멍을 찾지 못한 손가락이 헛돌 때마다 부은 끝마디가 파들거렸다. 아이는 나를 보지 않았고, 나 역시 그 짓무른 손등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야학에서 받아온 연필만 만지작거렸다. 닳은 끝이 손바닥 굳은살을 찔렀으나 통증은 명치 아래에 먼저 고였다.
"내일 아침에 나간다."
어머니의 말은 설명이 아니라 선고였다. 거친 손이 저고리를 보퉁이에 쑤셔 넣는 동안 천이 비명을 지르며 구겨졌다. 나는 연필을 부러뜨릴 듯 움켜쥐었다. 어머니의 팔꿈치가 봄이의 등을 문 밖으로 떠밀었을 때, 아이는 비명 대신 억눌린 숨을 터뜨리며 내 옷자락을 낚아챘다. 짐승처럼 매달리는 악력에 내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억지로 떼어내는 손길이 엉키며 봄이의 손톱이 하얗게 뒤집혔다. 그 찰나의 선연한 고통이 눈에 박히는 것과 동시에 내 손등의 해묵은 상처가 다시 터졌다. 울컥 솟은 피를 닦을 여유조차 없었다. 나는 상처를 바닥의 흙먼지에 대고 비벼 껐다. 무엇이 더 더러운지 가늠할 틈도 없이, 비릿한 피 냄새를 흙냄새로 덮어버렸다.
대문이 닫히고 집 안을 채운 것은 아이의 체취가 아니라 눅눅한 기름과 시멘트 가루의 악취였다. 밥상 앞에 앉았으나 숟가락은 들리지 않았다. 뱃속에서는 비어버린 창자들이 서로 달라붙으며 기괴한 소리를 냈고, 어머니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냄비 긁는 소리가 멈춘 자리에 들어찬 침묵이 귀청을 찢는 환청이 되어 울렸다.
야학의 등불 아래 앉자마자 나는 연필로 책상을 깊게 찍었다. 종이 위로 흩어진 글자들은 마치 봄이의 뒤집힌 손가락처럼 기괴하게 엉켰다. 나는 종이를 찢는 대신 연필을 부러뜨릴 듯 눌러 그었다. 손등의 피딱지가 떨어져 종이 위에 검붉은 자국을 남겼으나 지우지 않았다.
밖에서는 톱질 소리가 일정하게 이어졌다. 그 소리는 마치 나와 봄이 사이의 거리를 잘라내는 소리 같기도 했고, 내 뼈를 깎아내는 소리 같기도 했다. 나는 그 소리에 맞춰 삐뚤어진 획을 몇 번이고 덧칠했다.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이 목을 조여왔지만 멈추지 않았다. 종이가 찢겨 나가고 연필심이 가루가 되어 흩어져도 상관없었다. 나는 지금 글자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동생을 버린 이 밤의 부채감을 종이 위에 깊숙이 매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