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는 만큼 보일까.
브런치 이웃 글에서 '독서 총량의 법칙'이라는 표현을 봤다. 기억 속 맥락은 이렇다. "읽었다는 생각에 독서량이 감소하고, 읽지 않았다는 후회로 독서를 시작한다." 예외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법칙의 증명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현실은 법칙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성공한 사람은 과거보다 치열하지 않다. 치열하게 살고 있다면 성공에 가까울 것이다. 은퇴한 운동선수의 급격한 체중 증가, 운동을 싫어했던 비만인의 다이어트도 비슷한 사례다. 이것이 늦게 시작한 독서가 늦지 않다는 추론의 시작이었다.
나에게만 해당하는 추론도 필요했다. 글 쓰는 사람들 독서량이 나보다 많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하지만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업무, 육아, 시험, 대인관계 등에 시달린다는 점이다. 반면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단점이 장점이 되는 좋은 예시다. 상대는 지쳤고 나는 이제 시작이다. 억지스러운 발상. 합리화로 봐도 좋다. 어떻게 생각해도, 가속이 붙는 쪽은 나다.
"아는 만큼 보인다."
정말 좋은 뜻인데, 내가 필요한 것은 "원하는 방향으로 보인다."라는 몰입이었다. 최근 그 차이를 전봇대를 보면서 깨달았다. 자격증 취득 전까지 전봇대는 콘크리트 기둥일 뿐이었다. 취득 후 전봇대는 이렇게 변했다. "꼭대기 선은 피뢰침 역할을 하고 그 밑 3선이 3상 교류, 더 아래에는 중성선과 통신선이 있다." 말 그대로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도서관 앞에서 봤던 전봇대는 달랐다. 글을 잘 쓰고 싶다는 몰입은 다른 것을 보여주었다.
"주인공 직업이 전기 기술자인 소설을 읽어볼까?"
"직류 같은 글을 쓰고 싶은데 왜 교류처럼 오락가락할까?"
"나의 뇌 속에는 글쓰기를 방해하는 어떤 큰 저항이 있는 걸까?"
몰입하는 사고방식은 독서에서도 드러났다. <종의 기원>을 예로 들어보겠다. 30%도 이해하지 못했다. 책에서 얻은 생물학적 지식은 다큐 영상 5분 분량일 것이다. 지식 축적에 실패한 독서였다. 하지만 '글을 잘 쓰고 싶어서 시작한 독서'는 성공이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글을 쓰려면 얼마나 많은 자료를 다뤄야 하는지를 느꼈다. 논증을 풀어내는 글쓰기의 까다로움도 배웠다.
<유혹하는 글쓰기>를 읽고 "소설은 재능일까? 노력으로 어디까지 될까?"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투자에 몰입한 사람은 "주식은 재능일까?"라는 의문을 떠올린다. 축구라면 "드리블은 재능일까?"라고 느낄 게 분명하다. 글쓰기에 몰입한 사람에게 판매자와 구매자 이야기는 작가와 독자로 바뀐다.
늦게 시작한 독서가 늦지 않다는 추론의 단서는, 모두의 독서가 몰입하는 독서는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지식은 뒤쳐진 게 사실이다. 하지만 몰입하는 독서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독서에 실패한 원인을 돌이켜봐도 그렇다. "성공하려면 독서를 해야 한다더라!" 교양목적이거나 허영이었다. 최소한 과거의 나와 닮은 독서는 따라잡을 수 있지 않을까? 몰입 없는 독서를 따라잡는 기간은 1년이 적당하다는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