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보 악플러.
몇 해 전 위층으로 누군가 이사를 왔다. 처음 위층에 찾아갔을 때 들은 말은 "황당하네."였다. 나도 황당했다. 서로가 황당한 윗집과 아랫집 사이는 조용할 날이 없었다. "쿵, 쿵, 쿵, 쿵." 윗집 인간들 발 뒤꿈치에는 망치가 붙어있었다. 두 번째 방문. "그럼 새벽만이라도, 잘 부탁드립니다." 만족스러웠다. 감정을 억누른 대화는 이성적이었고 내가 생각하는 어른의 표본이었다.
80Kg 역기를 시멘트 바닥 위에 소리 없이 내려놓는 작업은, 그것을 들어 올리는 것보다 어렵다. 그들도 그랬을 것이다. "쾅, 쾅, 쾅." 쾅은 나의 소리다. 신경질적으로 천장을 '쾅' 후려치면 '쿵'은 사라졌다. 그렇게 몇 번이나 반복했다. 어떤 날은 세탁실 배수구 쪽을 향해서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감정은 이성보다 효과적이었다. 한 번 터져버린 감정은 숨지 않았다. 잔인한 영화를 보고 잠든 날 흉측한 꿈을 꾸었다. 발 뒤꿈치가 톱으로 썰리고 있었다. 그것이 누구의 발인지, 썰고 있는지 썰리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층간소음 살인사건 뉴스가 남 일 같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성적으로 고민했다. 오래된 아파트는 층간소음에 약하다. 내가 예민하다는 가정도 해봤다. 거실을 걸으면서 나의 발에 집중해보기도 했다. 위가 아니고 옆이나 대각선이라는 가정도 있었다. 윗집에 처음 찾아간 날 그 집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쿵, 쿵, 쿵, 쿵" 현관문 건너편 소리가 확실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이성적 판단이 알려주었다. 윗집이 층간소음 가해자라고. "제가 더 참았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이성적인 사람은 마지막에 저렇게 말했다. 감정적인 사람은 교양이 없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감정은 문제 해결을 도왔지만 다루기가 버거웠다. 이성을 유지했을 때에는 '100 쿵'에 '쾅'은 한 번이었다. 감정에 지배당하면 '50 쿵'도 안 돼서 '쾅'은 세 번이나 등장했다. 살인 충동이 생겨날 즈음, 속는 셈 치고 이성으로 돌아왔다.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나. 혐오를 키우는 것도 나. 나만 손해였다. 여기에서 짧지 않은 정체가 있었다. 이성이 맞나, 감정이 맞나.
<공감에도 연습이 필요합니다>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정확하진 않다. "술 취한 사람이 길에서 여러분에게 욕을 하면 기분이 나쁘지요? 그런데 돌아서면 보통은 잊습니다. 하지만 가까운 지인의 작은 비판에는 왜 그렇게 며칠씩 앓는 걸까요?" 저자는 공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갔는데 딴생각을 하느라고 흐름을 놓쳤다. 그때 문득 층간 소음이 떠올랐다. 층간소음은 취객의 무차별 욕설이었고, 나의 분노는 지인의 작은 비판에 끙끙 앓는 것과 닮아 보였다.
내가 행복한 사람이었다면 층간소음에 이렇게까지 분노했을까. 정도의 차이는 있겠다. 취객의 욕설을 하루종일 견딜 수는 없을 테니까. 어쨌든 극단적인 상황을 제외하면 분노는 '섞여서' 터진다. 이사 갈 돈이 없는 게 윗집 탓은 아니다. 그들도 돈이 없으니까 아래층에서 '쾅'해도 바닥에 흡음재 방음재를 깔 수 없는 것이다. 분노는 층간소음만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답답함, 불안, 불쾌, 우울, 짜증.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있었다.
악플을 다루는 매거진을 삭제하고 글은 다른 쪽으로 옮겼다. 악플러를 비난하는 작업이 숭고하진 않겠지만 정당성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악플러를 향한 분노 속에는 나의 다른 감정이 섞여있었다. 순수한 악플러는 흔하지 않다. 자신이 옳고 상대가 틀렸다는 이성적 판단에 들어서면, 섞였던 분노를 터트리는 것이다. 나와 그들은 다를 게 없었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쿵'소리가 몇 번 났지만 화가 나지 않는다. 유달리 시끄러우면 이성적으로 '쾅'을 할 수는 있겠다. 화내는 사람을 보면 불쾌함보다는 그 사람이 겪고 있을 우울과 불안을 떠올린다. 이제 조금은 이해가 된다. 그들의 분노는 윗집을 '쾅'하던 내 모습이었다. 분노가 많았을 시기와 마음고생하던 때가 겹치는 것 같기도 하다. 부모님과의 통화가 짜증 났던 이유가 부모님 때문이었을까. 돈 이야기 안 하고 서로가 건강했다면 예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윗집을 용서한다기보다는 내가 나에게 공감하는 느낌이다. 지금 밖에서 들리는 오토바이 엔진소리가 짜증 난다는 감정 속에는 글이 잘 안 써지는 분노가 섞여있다. 글이 잘 써졌다면 덜 짜증 났거나 지금쯤 잊어야 하는 게 맞다.